[이슈&경제] 멧돼지를 위한 항변

얼마 전 우리나라의 도시화율이 91%를 넘었다. 전 국민 10명 중 최소 9명 이상이 자연환경을 떠나 도시에 정착해 살고 있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자연환경과 인간의 거주터가 맞닿아있는 농산어촌 지역에서 도시로 이주하는 비율이 높아지면서 텅 비다시피 한 자연과 인간의 접경지역이 시간이 지날수록 급격히 늘고 있다.

이런 도시화와 맞물린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최근 거대한 몸집을 한 채 야생의 서식처를 벗어나 인간의 삶의 터전으로 진입해 인명과 재산피해를 일으키며 자신들의 목숨까지 잃는 동물로 뒤숭숭한 뉴스를 만나는 일이 적지 않다. 우리는 이 동물에게 난폭하고 사나우며 예측하기 힘든 행동을 보인다는 꼬리표를 달아주었다. 멧돼지가 그 주인공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멧돼지와 달리 이 동물을 이해하려면 적어도 몇 가지는 되돌아볼 것들이 있다. 우선 멧돼지는 야생동물 중에서도 유달리 길게 발달한 코를 가진 동물인데, 이 코가 거의 완벽에 가까운 후각 능력을 갖추고 있어 개보다 더 뛰어난 탐지능력을 발휘한다는 점이다. 아울러 이 코의 기능을 보완하고 생존능력을 증진시킬 수 있도록 발달된 것이 크고 넓게 발달한 귀다. 사실 멧돼지는 야생에서 이 두 가지 감각수단으로 지금까지 잘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데 조물주가 너무 공평했을까? 불행히도 멧돼지의 시력은 있으나 마나 할 정도로 약한 편이라 수 미터 앞에 있는 사물을 명확하게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다. 

이런 태생적 한계 때문에 언론과 뉴스에 등장한 멧돼지는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사람과 담벼락을 향해 돌진하거나 건물 출입문을 부수거나 자동차와의 정면충돌을 일으키기 등 험악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보인다. 만일 멧돼지의 가시거리가 지금보다 2배쯤 증가한다면 아마 사람이나 사물을 그리 험악하게 들이받는 일은 현저히 줄어들지도 모른다고 판단된다.

 

실제 야생의 멧돼지는 아주 섬세한 동물이다. 소리에 민감하고 쉽게 놀라며 어디론가 도망가는 일에 엄청난 체력을 소모한다. 거대한 몸집에 비해 좁고 단단하기만 한 사지말단의 발가락들은 섬세한 방향전환에도 큰 도움이 못되며 이로 인해 오로지 앞으로만 달리는 것처럼 보이게 한 원인이 된다. 

약한 시력 때문에 좁고 복잡한 틈새를 새처럼 자유롭게 통과해 가지도 못하다 보니 큰 소리가 나거나 비명이 들리거나 움직임이 감지되면 그쪽을 향해 죽기 살기로 덤벼들 듯 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멧돼지와의 조우한 상황에서 피해를 입지 않으려면 딱 몇 초 동안만 침묵을 지키고 조용히 서 있거나 살짝 자리를 옮기기만 해도 충분하다.

 

오늘날 대한민국 땅에서 인간이 멧돼지와 충돌하게 되는 이유는 단순 명쾌하다. 그들의 삶의 터전으로 인간들이 ‘무단침입’했기 때문이다. 지구 상에서 다른 생물과의 지혜로운 공존을 잘 실천하지 못하는 유일한 동물…. 나 자신, 인간이 아니라고 부정할 자신이 있을까!

 

뻐드렁니처럼 기이하게 솟아오른 송곳니를 가진 야생의 멧돼지는 늘 고달프고 거칠며 아픔도 많다. 그에 못지않게 사람이 가진 멧돼지에 대한 인식 또한 아름답지 않은 쪽으로 튀어나와 있다. 그 튀어나온 인식의 방향과 길이만큼 멧돼지들의 삶은 정말 가슴 시리고 고달프며 온몸이 아프고 힘들다. 그들과 공존할 방법을 찾아야 할 때가 지금인 듯하다.

 

루소가 우리에게 남긴 말이 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그런데, 아쉽게도 여기에 세 글자 ‘맨발로’가 빠진 듯하다. 질주해오는 멧돼지에게 총을 들이대기 전, 맨발로 그들을 만나보자. 맨발은 멧돼지들이 살아가는 땅이 얼마나 험하고 거칠며 그들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를 절감하게 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박병권 한국도시생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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