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완장

1989년도에 ‘완장’이라는 TV 드라마가 방영되었다. 동네 건달인 임종술이 동네 저수지 감시원으로 발탁되자 늘 팔에 완장을 차고 다니며 열심히 저수지를 감시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점차 완장이라는 권력놀음에 빠져 안하무인으로 사람들을 괴롭히다가 결국 동네에서 쫓겨난다는 이야기다. 소설가 윤흥길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완성도 높은 스토리와 딱 그 자체가 종술인 배우 조형기의 흡인력 있는 연기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드라마를 보면서 인간은 아무리 하찮은 완장이라도 완장을 차는 순간 변질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었다.


조그만 마을의 저수지 감시원의 권력이 그 정도인데 심지어 사회를 움직일만큼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의 권력이 어떠할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실제로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권력행태가 최근 연이어 터져 나오고 있다.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회항 사건 이후로 대기업 오너들이 부하직원에 대한 횡포가 시리즈로 보도되고 있다. 


이들 갑질하는 슈퍼 갑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다 자기중심적이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부하직원을 하나의 소모품이나 도구로 이용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 자기 기분에 의해 폭력, 폭언을 행사하고 쉽게 해고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나 이해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 


이러한 속성은 놀랍게도 사이코패스와 똑같다고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사이코패스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중에도 많이 있다는 것이다.


정신건강의학과 김병수전문의는 저서 ‘마음의 사생활’에서 사이코패스와 권력중독자는 뇌의 구조와 행동패턴이 일치한다고 밝혔다.


그는 ‘권력자와 사이코패스는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 신경 네트워크의 변화가 똑같이 나타난다’ 며 ‘권력을 갖고, 권력에 극단적으로 의존하게 되면 누구든지 변한다’고 말한다. 권력이 뇌 자체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권력은 마약처럼 중독성이 강해서 더욱 권력에 집착하게 되고 그럴수록 사람을 변질시킨다. 드라마 ‘완장’에서 종술이 처음에는 자신의 본업에 성실히 임했으나 완장의 맛에 취해 갈수록 변질되는 것처럼 말이다.


요즘 한 지상파 방송사의 드라마에 문정왕후의 오라버니였던 윤원형과 그의 첩 정난정이 권력을 부리는 이야기가 나온다. 정난정은 당시 본처를 독살하고 정실자리에 오른 후 정경부인의 작호를 받아 온갖 영화를 누리며 악행을 일삼았다. 드라마에는 나오지 않지만, 정난정의 오라버니인 정담은 여동생이 사악한 짓을 하는 것을 알고 그녀를 멀리했다. 정난정이 후에 반드시 대가를 치를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집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철저히 막았다. 문정왕후가 죽고 난 후 윤원형은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고 이어 정난정과 윤원형은 나란히 자결했다. 정난정의 비참한 최후에도 정담은 정난정과 연루되지 않았던 터라 무사할 수 있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족 중 누군가 권력을 잡게 되면 온가족이 권력을 제 것인 양 휘두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들 중에는 권력의 달콤함에 취해서 더욱 더 권력을 탐닉하다가 끝끝내 추락하기도 한다. 


일개 완장을 권력으로 착각하고 세도를 부렸던 임종술, 남의 자리를 빼앗아 권력을 부리다 비참한 최후를 맞았던 정난정,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여동생을 멀리하고 자신의 자리를 지켰던 정담, 이들 행보의 극명한 대비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사서삼경의 하나인 대학에 나오는 글로 성리학 창시자 주희가 한 말이다. 원문은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이다. 


‘이 세상의 이치를 열심히 공부하여(격물), 완벽하게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고(치지), 진실한 뜻을 품고(성의), 마음을 바르게 한다(정심). 그리고 몸을 깨끗이 하면(수신) 집안이 바로 서고(제가) 나라를 잘 다스리게 되고(치국) 천하를 평정하게 된다(평천하)’라는 뜻이다. 


행동을 하기에 앞서 제일 먼저 공부에 힘을 쓰고 세상의 이치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함을 강조한 말이다. 그래야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갑질논란으로 시끄러운 요즘 완장을 찬 모든 이들이 새겨 들어야 할 말이다.



이국진 칼럼니스트, 의정부문화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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