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의 공습이 있기 사흘 전인 8월14일에 시리아인권관측소가 내놓은 통계에 따르면, 지난 보름간 행해진 공습으로 알레포에서만 무려 327명이 숨졌는데, 그 가운데 어린이가 76명이라고 한다. 그러니 극적으로 구조된 옴란의 경우는 운이 좋은 걸까. 설령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고 한들, 그 운의 유효기간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시리아에 남아 있으면 죽음이 코앞인데, 그렇다고 떠날 수도 없다. 목숨을 걸고 떠난들, 어디서 순순히 받아줄까. 1년쯤 전에 터키 해변에서 발견된 세 살배기 아일란 쿠르디의 주검이 세계인을 분노와 슬픔에 몰아넣었던 것도 ‘약발’이 다했다. 전 세계가 약속이나 한 듯이 시리아 난민을 ‘투명인간’ 취급한다.
주홍글씨가 된 사람들, 어딜 가나 환대받기는커녕 홀대당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시리아 난민들이다. 난민을 가장한 테러분자일지 모른다는 의심, 사회치안을 어지럽히고 국가경제를 갉아먹을 것이라는 우려, 여기에 이들의 종교인 이슬람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증오까지 더해져 아무도 곁을 내주지 않는다. 그 결과, 떠나지 못하고 시리아에 발이 묶인 애꿎은 민간인들만 전쟁의 광기에 희생당하고 있다.
불교의 법화경에 유명한 ‘독화살의 비유’가 나온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독화살을 맞았다. 이를 보고 사람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한다. 누가 화살을 쏘았는가, 왜 쏘았는가, 화살촉에 묻은 독의 성분은 무엇인가, 얼른 독화살을 뽑아내고 치료부터 하는 게 마땅한 순서일 텐데, 엉뚱하게도 시시비비를 가리느라 시간만 허비한다.
기독교의 성경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많다. 이를테면 마가복음에 나오는 귀신 들린 아이의 경우다. 귀신이 아이를 사로잡을 때마다 아이는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면서 몸이 뻣뻣해진다. 이 귀신을 몰아내 달라고 아이 아버지가 간절히 요청하는데도, 예수의 제자들은 율법학자들과 논쟁하기에 여념이 없다.
어느 종교인들 시리아 난민 문제에 무고할까. 나는 책임이 없다고 손을 씻는 즉시,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욕을 혼자 다 먹는 본디오 빌라도가 되리라. 게다가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가 공히 추앙하는 아브라함 역시 난민이지 않았나. 하여 ‘떠돌이를 환대하라’는 윤리를 발전시킨 것이 세 종교가 인류 문화에 남긴 위대한 유산이 아니던가.
종교의 본령은 사랑이다. 사랑은 곁을 내주는 행위다. 곁을 내주는 일에는 두려움과 불안이 따른다. 불편과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도 한다. 그래도 사랑하라! 마침내 사랑이 이긴다! 이 믿음이 참 종교다. 사랑 대신에 증오를 가르치는 종교는 그저 종교를 가장한 정치에 불과하다.
다시 옴란의 사진을 본다. 누가 이 아이에게 곁을 내줄까. 누가 이 아이를 사로잡고 있는 전쟁귀신을 내몰 수 있을까. 정치로는 못 한다. 오직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마지막 사랑이 답이다. 그 사랑이 꽃처럼 피어날 때 비로소 전쟁귀신이 물러날 것이다. 세상을 구하는 건 총이 아니라 꽃이다.
구미정 숭실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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