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 쇼크, 그 후] 英 현지 건축가 손원일씨

“왜?” 의구심 떨치고… “잘 헤쳐 나갈 것” 하나된 영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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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의 개인 사업자, 개발자 스타트업하는 사람들을 위한 오피스. 다양한 이벤트들이 일어나는 공간인 영국 런던의 빅토리아 알버트 뮤지엄 중정. 타워브릿지가 보이는 시청 앞 광장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 영국은 굳건히 나아간다.”

 

나는 영국 런던에 사는 건축가다. 2011년 교환학생을 시작으로 중간 1년의 고국 생활을 빼면 벌써 이곳 생활만 5년째다. 꿈에서 영어를 쓰는 것이 편할 정도로 현지 적응이 잘 된 외국인이다.

 

중앙대 건축학과 4학년이던 지난 2011년 교환학생 신분으로 세계적 축구 구단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있는 맨체스터로 왔다. 오기 전 박지성, 호날두, 퍼거슨 감독 등 어릴 적 새벽시간 TV로만 보던 주인공들을 직접 만날 수 있다는 설렘이 가득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당시 영국은 ‘암울’ 그 자체였다. 2008년 발생한 서브프라임모기지론 사태가 세계 경제를 먹구름 속으로 몰아넣었을 때였고, 이에 직격탄을 맞은 영국 경제는 그때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제 막 건축가 타이틀을 단 새내기 영국인 건축가들 대다수가 취업이 되지 않았다.

 

건축업 종사자로서 경제 상황은 우리에게 무척 민감하다. 경기가 좋아야 투자자가 있고 투자자가 있어야 건축물을 지을 수 있는 구조인데 불황은 이 같은 흐름을 단절시킨다. 인간의 기본 욕망이 의·식·주라고 할 만큼 ‘아름다운 건축물’은 우선되는 욕구다. 그런데 당장 돈이 없는데 새롭고 아름다운 건물을 짓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러던 영국이 2013년 이후 경제가 나아질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2013년 9월 런던의 한 대학에서 건축학 석사 과정을 밟고자 런던에 거주할 때다. 전보다 주변 새내기 건축가들이 취업을 수월하게 했다. 건축 법인을 찾는 투자자와 고객이 많아졌다는 말이다. 밥벌이가 됐다.

 

이에 나에게도 희망이 생겼다. ‘영국 건축을 배워 한국에 들여오고 싶다는 꿈을 실현할 가능성이 보였다’가 맞을 것이다. ‘석사 졸업 후 외국인인 나도 취업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석사 공부에 전념했다. 졸업 후 나는 지난해 초부터 250명 규모의 한 중견 건축설계사 법인에 운이 좋게 취직했고, 현재까지 일하고 있다.

 

최근 런던의 경제는 나름 괜찮다. 건축가 처지에서 볼 때 그렇다. 런던 곳곳에 개발 붐이 불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3~4년을 살펴보면 여기저기 활성화되는 현장이 무척 늘었다. 과거 서울이 명동, 동대문, 종로 등 강북 중심이었듯 런던 역시 강북이 전통적으로 중심이다. 

이후 서울 강남이 개발 되었듯이 지금의 런던도 강남이 뜨고 있다. 런던 강남에 얼마전 미국대사관 이전을 위한 공사가 시작되자 그 주변이 개발 열풍에 빠져들었다. 영국 경제가 그래도 괜찮다는 의미겠다.

 

이는 건축 업계만의 일이 아니다. 런던 자체가 활기차다. 그러던 영국이, 5년전 바닥을 치던 경제가 이제야 숨통이 트이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브렉시트라니, 당연히 상상도 못했다. 불과 2~3개월 전만 해도 내 주변은 ‘브리메인(Bremain·영국의 EU 잔류)’이었다. 모두 현재의 영국에 만족했다. 적어도 내 주위에서는 말이다.

 

■ 브렉시트 발표 후

영화 베테랑에서 나온 유명한 대사가 있다. “어이가 없네!”다. 브렉시트 발표 당일 이곳 현지 분위기가 딱 그랬다. 어제까지 갈등 없이 만나던 애인이 다음날 아침에 헤어지자고 통보한 꼴이 됐다. ‘이렇게 먹고살 만 한 대?’, ‘누가 변화를 선택하려 했지?’ 라는 의구심이 한동안 런던 전체를 충격에 몰아넣었다. “왜?”라는 말이 당시 만난 이들 간의 첫마디였다.

 

우선 가장 크게 놀란 이들은 영국인과 유럽인들이었다. 나 역시 놀랐으나 그래도 이들만큼은 아니었다. 나야 어차피 외국인 신분으로 영국이 EU던 비(非) EU던 크게 중요치 않는데다, 영국이 EU에서 분리될 때쯤이면 고국으로 되돌아가도 상관없어서 일 것이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다르다. 우선 유럽의 대륙인들이 외국인으로 분류되는 것, 이는 매우 큰 혼란을 예고할 것이다. 당장 내가 있는 건축 법인만 봐도 알 수 있다. 우리 법인 역시 영국인보다 스페인 출신 건축가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유는 스페인은 졸업과 동시에 건축가 자격을 주는 특성이 있어 젊고 유능한 건축가가 많이 배출되는데, 이를 영국 건축업계에서 선호해 유입하려는 특징이 있어서다. 스페인 건축가들이 외국인이 되면 그간 나 정도만 챙겼던 우리 회사가 상당수 인원을 외국인 근로자 비자에 대해 발급해야 하는 문제에 놓인다.

 

사실 영국은 같은 유럽 내에서도 다들 동경하는 나라인지라 EU의 유능한 인재들이 이곳으로 많이 유입된다. 분야를 막론하고 영국을 ‘기회의 땅’으로 여기는 EU 청년들이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이 나와 같은 외국인으로 분류된다면 영국계 회사들은 ‘갑자기 외국인으로 분류된 이들의 처리 문제’로 골머리를 썩게 되고, 능력이 있는 EU 젊은이들은 ‘차라리 이럴 바엔 다른 나라로 가야지’라는 분위기가 형성될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영국 축구는 어떻게 될까? 축구 세계 4대리그 중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은 자국 리그에 자국선수들이 많지만 영국 리그에는 유럽 선수와 감독들이 많다. 이들이 모두 어느 순간 외국인 신분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는 젊은 유망주들을 유입할 가능성을 배제시킬 우려가 있다.

 

■ 앞으로의 영국

브렉시트 발표가 난 지 한달 반이 지났다. 발표 후 단 며칠 간 혼란했던 영국은 몇 주가 지나기도 전 ‘언제 시끄러웠냐’는 듯 조용하다. 사람들이 결과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지금도 한국의 지인들이 나에게 ‘영국은 이제 어떻게 하느냐’라는 식의 질문을 많이 한다. 그러나 이곳은 아무렇지 않다.

 

외국인이자 비전문가로 영국인들과 동고동락(同苦同樂)한 내가 이곳 상황을 정리하면 “안갯속”이다. 또 그들의 미래를 판단하면 “늘 그랬듯이 영국은 잘 헤쳐 나갈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이는 영국인들의 민족성에서도 알 수 있다. 사실 이들에게 EU를 들어가느냐, 마냐 등은 논쟁의 대상이었을 뿐 생존권과는 별개였을 것이다.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영국인은 그동안 ‘나 자신의 이익 극대화’를 위해 살아왔는데, 이는 역설적이게도 브렉시트를 통해 영국이 하나로 뭉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브렉시트의 부작용이 이들 개인에게 해가 될 것을 이들은 가장 두려워해서다.

 

영국은 혼란을 빠르게 정리하고 있다. 브렉시트란 결과를 뒤집으려 하지 않고 결과를 빠르게 수용하고 이를 어떻게 헤쳐나갈지 고민 중이다. 오히려 브렉시트가 영국을 반등시키는 계기로 삼으려는 움직임도 있다. 어차피 정한 길, 슬기롭게 헤쳐 나아가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곧바로 총리가 바뀌었고, 이를 영국인들이 믿고 따르고 있다.

 

경제에 민감한 건축 업계도 브렉시트의 영향을 사실상 받지 않고 있다. 일부 회사에서는 브렉시트 직후 인원감축을 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일부에서는 실제 인원감축까지 진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런던은 개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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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렉시트가 나에게 던진 것

나는 영국이 좋다. 이곳은 한국처럼 갑질 문화도 없고 야근 문화도 없다. 이직도 자유로우며 오히려 이직을 환영한다. 윗사람들에게 말 한마디 편히 건넬 수 있다. 미국처럼 동양인이라는 이유의 인종차별은 더욱 볼 수 없다. 

특히 건축업의 역사가 오래됐다. 우리나라처럼 일단 모든 것을 부수고 고층화를 시킨다기 보다, 기존의 건물을 살리려는 전통이 대단하다. 수백 년 된 저층 건물이 런던에 빼곡하다. 건축가들이 배울 것이 많다는 의미다. 나는 그들이 잘 되길 바라는 외국인이다.

이러한 나에게 브렉시트가 던져준 것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동기부여다. 2년을 전후로 영국이 EU를 탈퇴한다면, 나는 그간 내국인으로 취급받아온 유럽인들과 같은 외국인으로서 치열하게 경쟁해야 한다.

 

브렉시트가 아직은 현실화 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우려하는 것을 정작 이곳에서 느낄수 없었을 만큼 이곳은 여유롭다. 앞으로 브렉시트를 통해 더욱 발전할 영국을 기대한다.

 

정리=조철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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