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학술토론회] “과거 천년은 미래를 보는 거울… ‘지방의 맏형’ 정체성 찾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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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아이덴티티(identity정체성)는 무엇인가. 본보는 창간 이후 지난 28년간 경기도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해 왔다. 경기도는 오는 2018년 경기천년의 해를 앞두고 있다. 

경기도는 고려시대 개경과 조선시대 한양, 일본강점기 한성부ㆍ경성부, 대한민국 건국 이후 수도 서울의 주변에서 그 역사를 함께 해 왔다. 앞으로 통일의 시대가 오면 한반도의 중심인 경기도는 통일 한국의 중심부의 역할을 과거 천년 동안 해 왔듯 그 역할을 앞으로도 수행해야 할 것이다. 

이에 본보와 경기연구원은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와 함께 과거 천년의 역사 속에서 경기도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 천년 경기(京畿)’의 모습을 찾고자 한다. 본보와 경기연구원은 지난달 26일 오후 2시 경기연구원 대회의실에서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후원으로 ‘경기천년기념 학술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번 학술토론회는 ‘왜 다시 경기인가’를 주제로 열렸다. 박정신 전 숭실대 부총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토론회에서는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경기, 그 천년의 이력)과 임종권 한국국제학연구원장(세계 천년의 도시와 경기), 허성관 전 광주과학기술원 원장(동북아 국제무역 중심경기), 김용국 아시아문화연구원장(동아시아 경기제의 변천과 경기도의 오늘)이 주제 발표자로 나섰다. 

이날 토론자들은 과거 천년의 역사 속에서 경기도가 보유하고 있는 강력한 문화적 유산으로 가치와 역할을 세심하게 더듬어가며 미래 경기 천년의 문을 여는 깊이 있는 논의를 펼쳤다.

박정신 전 부총장은 “역사학은 눈의 학문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왼쪽 눈으로 보면 ‘좌파’, 오른쪽 눈으로 보면 ‘우파’, 현존 질서, 제도, 가치, 흐름, 이런 것을 두 눈으로만 보고 분석하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눈으로 보는 자기성찰이 필요하다. 

역사학은 특히 눈의 학문이다. 윤리학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t Carr)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강조했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대화하는 학문, 현재는 과거이고 미래이다. 역사학은 과거, 오늘, 현재의 학문이다”라면서 “경기도가 과거를 통해 새로운 천년을 그려보는 미래학으로서의 학술모임을 기대한다. 어제와 오늘 미래를 그려보는 학술토론회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임해규 경기연구원 원장은 “경기도의 아이덴티티를 찾는 문제는 본원의 주된 과제다. 경기천년과 경기 아이덴티티 문제를 계속 고민해 왔다”며 “오늘날의 경기도는 중앙집권적 국가시스템에서 벗어나 중앙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지방에 맏형으로서의 아이덴티티가 있어야 한다.

경기도가 보유하고 있는 강력한 문화적 유산으로서의 가치, 지리적지정학적 유리함 때문에 엄청난 문화의 보고가 남아있다. 이를 잘살려야 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다”라고 말했다.

■ 경기, 그 천년의 이력-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경기라는 용어의 이념적 기초는 중국의 ‘시경’, ‘서경’, ‘예기’, ‘주례’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경기의 유래는 당나라 현종 때에 왕도의 주변지역을 경현과 기현으로 나누어 통치했던 것에서 찾을수 있다. 흔히 경기(京畿)란 서울을 둘러싼 그 문지방이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우리의 역사에서 경기지역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한 계기는 고려 왕조의 성립과 관련이 있다. 태조 왕건이 개성에 도읍을 정하면서 경기지역은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 무대로 등장한다. 경기라는 명칭의 지방 행정조직이 편제된 것도 역시 고려시대이다. 

성종 14년의 적기 13현은 그 후 현종 9년에 경기로 된 지역이며 고려 말까지 언제나 경기의 모체가 된다. 정식으로 경기라 칭한 것은 현종 9년이고 경기라는 제도가 성립된 것은 성종 14년의 일로 이해할 수 있다.

 

경기도가 하나의 지방행정구역으로서 오늘날과 비슷한 지역을 가리키게 된 것은 조선조 세종 이후의 일이다. 1985년(고종32) 23부제의 실시 결과 경기도는 3부(한성, 인천, 개성) 34군으로 분리됐고 경기도는 일시 소멸됐다. 1896년 아관파천 이후 전국 13도, 7부, 1목, 231군으로 변경됨에 따라 다시 경기도로 부활했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에는 중앙직할지였던 한성부가 경성부로 개칭돼 경기도에 편입됐다. 이때 한성부를 경성부라 개칭하고 한성부보다 격이 낮은 경기도의 소속관서로 해 수도로서의 개념을 없애고 일개 군과 같이 격하한 것이다. 

경성부가 서울특별시로 독립된 것은 1946년 9월로 미군정이 수립된 지 1년이 지난 시점이다. 행정조직 담당을 위한 미군정의 부대의 배치 역시 경기도를 중심으로 집중됐다. 1945년 8월15일 역사적인 해방을 맞이했으나 경기도 행정구역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대폭 축소됐다.

 

해방 이후부터 6·25 발발 직전까지 경기도는 38도선 접경이라는 그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수많은 분쟁에 시달렸다. 1947년 3월18일 장단지역에서 남한 경찰과 소련군 사이에 총격전이 발생해 소련군 병사 2명이 사망하는 등 1950년 6.25전까지 수많은 충돌이 일어났다. 

6.25의 발발로 인해 경기도는 주요 전장으로 변해 피해 역시 막대했다. 1960년대 들어서는 경기도의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한 경인공업지역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됐다. 1970년대에는 고도성장을 이룩했고 1980년대에는 안정된 성장과 함께 수도권 전역에 널리 분산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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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6일 경기연구원 대회의실에서 경기천년 기념 제1회 학술토론회 ‘왜 다시 경기인가?’란 주제로 열린 학술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전형민기자

1970년대 종반 이후 대도시 집중의 인구 팽창에 직면하면서 도시인구 억제 사업을 보다 적극적이고 종합적으로 시행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이 추진된다. 80년대에는 수도권정비기본계획을 수립하는 등 이러한 권역 선정에 따른 지역개발 유도 전략은 90년대 몇 차례 수정을 거쳐 오늘날까지 계속 유지된다. 

2000년대 들어 빼놓을 수 없는 변화 중 하나는 경기도 제2청사 시대의 개막이다. 제2청사는 소외된 경기북부지역 발전을 모색하기 위해 북부출장소를 북부지청으로 승격시키고 부지사 행정체제로의 전환을 지시하면서부터 본격 추진한다. 

경기도는 새천년 시대의 문턱에 서서 오늘 2020년까지 도를 5개 권역으로 나눠 환황해권 중심지역으로 개발하겠다는 종합발전계획을 세우고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한 7대 핵심 추진전략이 추진되고 있다.

 

김동환 연구위원은 “경기도의 이력서를 쓰는 기분으로 발표했다. 경기도는 사실 한반도의 중심이면서도 과거나 현재, 미래의 정체성이 애매하고 미지근한 지역”이라며 “경기천년을 앞두고 문화적 정치적으로 정체성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이냐는 지속적으로 고민해야 할 부분”이라고 밝혔다.

 

■ 세계 천년의 도시와 경기 - 임종권 한국국제학연구원장

유럽은 권력자가 통치를 위해 도시를 건설했다.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여건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동양은 권력자의 인위적인 힘에 의해 건설됐다.

 

유럽은 문화와 다양성이 있는 통합적 방식으로 팽창되는 반면 동양은 권력체계가 무너지거나 권력구조가 미약해지면 스스로 소멸됐다. 도시가 만들어지는 내적 동기가 동양이 약하다.

 

경기가 천년을 맞아 도시의 모습을 유럽과 비교해보면 교훈이 될 것으로 보여진다. 근대화 과정에서 인류 사회의 변화는 농촌이 아닌 도시중심이다. 유럽도시는 자주적, 독립적이지만 동양은 행정중심밖에 내적 동기가 없다. 

동양은 겉모양은 근대적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유럽과 상이한 시스템과 체계를 가지고 있어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근대적 시스템을 도입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경기’ 자체가 도시화돼 있다. 경기도 전부가 다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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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박정신 前 숭실대 부총장
도시 속의 경기로 볼 정도다. 각 도시와 농촌을 분리해서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된 정책구조가 필요하다. 역사적 관점에서 따져보면 오늘날의 역사는 단편적이 아닌 전체적 행정ㆍ문화ㆍ사회 등이 내포돼 있어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오늘날 역사연구의 지향목표이다. 그런데 다 분리돼서 엇박자가 이루어졌다. 통합적으로 이뤄져야 성장할 수 있다. 

도시사는 행정이나 정치적 관점만이 아니라 통합적, 문화ㆍ인류학적 관점에서 연구하고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세계화는 교통망이 허술할 때는 서로간의 소통 교류가 어려웠지만 지구촌시대에는 통합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제는 국가 전체가 하나의 도시라는 개념을 가져야 한다. 영국의 EU 탈퇴를 보면서 EU라는 체제를 생각해보니 여러 다양한 국가가 하나로 통합되는 모습이 신기했다. 그것은 도시의 결합이다. EU는 국가가 아닌 도시의 연결이고 결합인 것이다. 도시중심으로 유럽이 발달하면서 도시가 국가를 발전시켰다. 도시는 고립된 자급자족이었던 것이 십자군전쟁 이후 상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발달했다.

 

동양은 권력자들이 통제하고 규제하는 구조지만 유럽의 영주들은 세금을 늘리기 위해서 상인들의 상업을 관리하고 지원했다. 그래서 유럽의 공무원들은 통제와 규제가 아닌 서비스적 관점에서 관료제가 발달했다.

 

유럽은 도시와 도시의 연결망으로 선진국으로 발전하고 자주적이고 총체적, 통합적, 융합적인 시스템을 만들어온 것이다. 유럽은 문화적인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유럽에는 도시연합이 결성돼서 EU의 지원을 받아 교류하고 의논한다. 유럽에는 도시가 독자적인 노선을 걸을 수 없다. 

우리나라는 혼란스럽다. 유럽은 전체적으로 안정적이다. 파리는 중세적인 모습을 그대로 지키고 보존하고 있다. 21세기 도시는 행정적 시스템과 더불어 도시의 재생정책, 인문학적 관점에서 함께 실현시켜야 한다.

 

경기도의 아이덴티티(identity정체성)는 무엇인가. 본보는 창간 이후 지난 28년간 경기도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해 왔다. 경기도는 오는 2018년 경기천년의 해를 앞두고 있다. 

경기도는 고려시대 개경과 조선시대 한양, 일본강점기 한성부ㆍ경성부, 대한민국 건국 이후 수도 서울의 주변에서 그 역사를 함께 해 왔다. 앞으로 통일의 시대가 오면 한반도의 중심인 경기도는 통일 한국의 중심부의 역할을 과거 천년 동안 해 왔듯 그 역할을 앞으로도 수행해야 할 것이다. 

이에 본보와 경기연구원은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와 함께 과거 천년의 역사 속에서 경기도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 천년 경기(京畿)’의 모습을 찾고자 한다. 본보와 경기연구원은 지난달 26일 오후 2시 경기연구원 대회의실에서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후원으로 ‘경기천년기념 학술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번 학술토론회는 ‘왜 다시 경기인가’를 주제로 열렸다. 박정신 전 숭실대 부총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토론회에서는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경기, 그 천년의 이력)과 임종권 한국국제학연구원장(세계 천년의 도시와 경기), 허성관 전 광주과학기술원 원장(동북아 국제무역 중심 경기), 김용국 아시아문화연구원장(동아시아 경기제의 변천과 경기도의 오늘)이 주제 발표자로 나섰다. 

이날 토론자들은 과거 천년의 역사 속에서 경기도가 보유하고 있는 강력한 문화적 유산으로 가치와 역할을 세심하게 더듬어가며 미래 경기 천년의 문을 여는 깊이 있는 논의를 펼쳤다. 

 

임종권 원장은 “경기가 천년을 맞이해 새롭게 도약하고 모든 사람들의 삶의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경기’ 도시들을 하나로 연결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의 네트워크가 필요로 하는 시점에 와 있다”며 “도시의 유럽이 되었듯이 도시의 ‘경기’가 되려면 도시마다 각기 다른 도시로서의 발전을 도모하기보다 공동의 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통합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동북아 국제무역 중심 경기 - 허성관 전 광주과학기술원 원장
국가가 번성하고 이런 시기는 대륙성과 해양성이 동시에 이뤄질 때다. 대륙성은 삼국시대, 해양성은 고려시대에 발휘됐다. 오늘날 경기도 문제를 논함에 있어 걸림돌은 남북분단으로 북한 개성지역 등은 경기도에서 제외됐고 인천과 서울도 제외돼 과거의 경기와 현재의 ‘경기’는 다르다. 


고려말 권신들이 정부 각 토지를 점거하면서 토지 겸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나 폐해가 발생하자 조선시대에는 과전을 경기도에서만 실시하면서 경기도 행정구역의 확대가 이뤄졌다. 현재 북한 개성 인구는 25만명, 고려시대에 벌써 50만명인 대도시였다. 

상업은 고려사에서 연구가 부족하다. 고려에서는 상업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벽란도에는 250칸정도 되는 객관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왕실이 상업을 좋아해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왕건은 무역상인가문 출신이다. 역참제도를 통해 실크로드가 정비되고 왕실에서 직접 장사에 나서기도 했다. 고려에는 없는 물건이 없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가 474년 지속된 것은 상업을 통해 긴장된 국가관계를 완화시키지 않았나 하는 예측이 가능하다. 요나라를 제외하고는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금나라와 고려는 관계가 특히 좋았다. 요나라와는 적대적이었다. 고급품을 송나라에서 들여오고 문방구류가 많이 수출됐다. 송나라 상인들이 대규모로 고려로 몰려(200년 동안 57회ㆍ연인원 5천명)왔다. 고려와 송과의 공무역은 고려에 유리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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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26일 경기연구원 대회의실에서 경기천년 기념 제1회 학술토론회 ‘왜 다시 경기인가?’란 주제로 열린 학술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이 토론을 벌이고 있다. 전형민기자
당시 은병 한 근이 벼 20석 가치였다. 송과의 무역 중심지는 벽란도였으며 원과의 무역은 공무역이 활기를 띠었다. 원과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아라비아와도 무역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고려는 연산도로부터 육로로 가서 요수를 건너서 동쪽으로 그 강역은 3천790리로 기록됐다. 고려의 영토가 반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요동성 허베이성 일대에 영향력을 미쳤다는 일부 의견도 있다. 


국력은 자신감의 발로인데 자신감은 고려가 조선보다 더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고려시대는 ‘대몽항쟁’, ‘요동정벌’ 등을 보였으나 조선시대는 ‘소 중화’로 약화했다. 생활수준은 일반적인 비교가 어렵다. 그러나 고려시대가 사치가 더 심했다. 양극화는 고려가 훨씬 더 심각했다. 대외적으로도 송나라는 요나라에 공물을 보내는 등 화의를 요청했으나 고려는 요나라를 대패시켰다. 국제관계에서 당시 남송보다는 고려가 우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허성관 전 원장은 “실학사상의 발원지가 ‘경기’다. 무역을 중심으로 초점을 맞췄다”면서 “ 중국과 일본은 경기가 봉건제하에서 나와서 봉건제 파괴 후에는 사라졌다. 우리는 중심지가 변하지 않는 한 경기는 없어질 수 없다. 우리가 경기천년을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야 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 동아시아 경기제의 변천과 경기도의 오늘 - 김용국 아시아문화연구원장
동아시아라 함은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을 지칭한다. 이미 3국이 역사적으로 많은 교류가 진행됐으며 또한 문화적 교류도 활발히 진행돼 3국이 문화에 상호 영향을 받았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에 아울러 3국이 공히 경기라는 제도를 실행했었다는 사실은 동아시아를 다른 시각에서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 판단한다. 경기란 한나라의 수도인 서울(京)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지역인 기(畿)를 의미하는 것으로 한ㆍ중ㆍ일 3국이 경기제를 통해 무엇을 구현하고자 했는가를 비교해 살피는 것은 대한민국의 경기도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판단한다.


중국 당나라에서의 ‘경기제’는 왕궁을 보위하기 위한 군사적인 목적을 가장 큰 것으로 삼아서 시작됐다. 군사, 정치적 목적, 물화의 목적에서 경기가 시작된 것이다. 특별 행정구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는 경기로 일반적 개념화되면서 오늘날의 성제로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 때는 경기를 ‘거중어경’이라 불렀고 ‘강간약지’라고 했다. 일본은 우리보다 먼저 경기제를 수용했다. 행정구역을 어떻게 조성하는 것이 황궁을 보호하고 천자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에서 출발했다. 중국과의 공통점은 특권이 부여되고 있는 지역으로서 조세와 부역이 면제되거나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봉건이념에 기초해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 경기제 도입의 이유다. 궁성을 에워싸고 보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경기라는 이름이 남아있는 것은 한국이 유일하다. 제도적으로 수용한 나라 중 유일하게 유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경기도의 역사가 의미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작은 경기에서 확대시켜 나가서 오늘날의 경기가 가능해졌다. 


이는 과전의 영향이 크다. 서양은 도시적 개념에서 농업생산성이 중요했다. 경기도 역시 물자가 흥성스러운 것과 더불어서 인위적으로 면적을 확장시켜온데 의미가 있다. 


현재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이 경기도에 살고 있다. 행정체제로서의 경기를 돌아봐야 한다. 대한민국의 중심에서 유효했는가를 돌아봤으면 한다. 지방과 서울을 잇는 문화, 인적교류의 중심지로서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고려와 조선을 잇는 경기도의 기능 중 중간지대로서의 완충지 역할을 한 것이 경기의 핵심적 의미다. 

서울을 따로 보고 경기도를 따로 봐서는 경기의 역사를 바로 볼 수 없다. 서울, 경기, 인천을 아울러서 오늘날의 경기를 읽어나가야 미래 경기의 천년을 볼 수 있다. 경기도와 인천, 그리고 서울이 함께 하는 논의의 장이 마련돼야 한다. 수도권 광역경제발전위원회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각 자치단체가 개별적으로 수행하는 발전 전략이 아니라, 이 지역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발전전략이 논의돼야 한다.


김용국 원장은 “향후 천년에 대한 계획은 경기라는 제도의 도입으로 현재 경기도로 유지되어온 지난 천년의 역사와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광의의 경기에 포함되는 경기도와 인천, 서울이 함께 실리와 공공성에 바탕으로 둔 논의로 대한민국 역사에서 맡은 바 역할을 직시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경기라는 지역이 동아시아의 문물이 교류하는 장으로서 소명을 수행하는 길이라 여긴다”고 주장했다.


■ 종합토론
강진갑 경기대 교수, 구미정 숭실대 교수, 김병기 독립운동사편찬위원장, 김소희 아시아문화연구원 연구원, 임연규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기획실장, 정암 전 관동대 교수, 조의행 신한대 교수, 이수행 경기연 선임연구위원, 황금회 경기연 연구위원 등이 토론자로 참석해 열띤 논쟁을 벌였다.


김병기 위원장은 김동환 연구위원을 발표에 대해 “경기도의 경제백서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인물 문화 역사를 반영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경기 천년의 역사적 의미와 통일에 대비하는 경기도의 미래비전도 제시됐으면 한다”고 지적했다.


정암 전 교수는 ‘세계 천년의 도시와 경기’ 주제 발표에 대해 “경기도의 미래를 얘기할 때는 경기도 자체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다. 내적 문제(경기도 자체), 외적 문제(외국, 서울, 전국과의 관계)가 있는데 그런 입장에서 층위를 낮추어서 경기도에 나타나는 문제들을 유럽과 비슷한 수준에서 비교, 논의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강진갑 교수는 “경기도가 경기천년과 관련해 많은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경기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경기도 천년이 뭐가 중요하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며 “균형감각을 제기할 수 있는 문제제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이수행 선임연구원은 “경기도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보다 명확하고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중국은 공산당이 도시의 성장을 억제했다. 중국은 2천년대 들어와 법률상 대도시의 성장을 허용했다. 앞으로 한ㆍ중관계에 경쟁 관계가 심화될텐데 중국의 도시정책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밖에 황금회 연구위원은 “대도시권이 집중 확장되고 있다. 이번 토론회를 종합해서 ‘경기’ 이데올로기의 대담론이 완성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최원재ㆍ김광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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