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아내의 코코넛

“선교사님, 이 마당에 있는 닭들은 모두 제 아내의 것입니다. 저 코코넛도, 파파야도 아내 것이고요. 저쪽에 있는 바나나 나무가 제 것인데, 모두 따먹고 남은 게 없어요. 선교사님께 드릴 것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어떤 한국인 선교사가 아프리카 정글에 사는 사람들에게 초대를 받아서 복음을 전하러 갔다. 서부 아프리카 가나에 있는 ‘쿠마시’라는 도시에서 통나무를 운반하는 트럭을 얻어 타고 한참을 간 후, 다시 정글 길을 제법 걸어서 ‘아카탄부라’라는 깊은 숲 속 마을에 도착했다. 나무와 풀로 엮어 만든 집들이 사오십 호 되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곳에 사는 아사모아가 몇 달 전에 수도 아크라에 갔다가 복음을 듣고 동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선교사 내외를 초청한 것이다.

 

정글의 삶은 말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대부분 옷을 입지 않았고, 옷을 입은 사람들도 다 떨어진 것으로 사시사철 용이었다. 식수는 도랑물이고, 빗물이 제일 좋은 음료수였다. 마을에는 벌레들이 가득하고, 무서운 체체파리가 집안에 종종 날아들었다.

 

이런 정글에 사는 사람들이 밤마다 모여, 서툴게 말하는 한국인 선교사의 설교를 밤이 늦도록 듣고 함께 노래도 불렀다. 생각지 못했던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주민들 모두 기뻐서 선교사에게 바나나, 파파야, 코코넛을 가지고 왔고, 어떤 사람은 정글에서 가장 귀하다는 닭을 잡아서 들고 왔다. 고요하기만 하던 정글에 모처럼 행복이 흘렀다.

 

그런데 정작 선교사를 초대한 아사모아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다. 어느 깊은 밤, 아사모아가 입을 열었다. “선교사님, 제 아내는 부잣집 딸이어서 우리 집 주변에 있는 과일나무도, 마당에 있는 닭들도 모두 아내의 것입니다….” 그곳 사람들은 부부라도 내 것 네 것이 철저히 구분되어 있어서, 아내가 자기 바나나 나무에 바나나가 많이 달려 있어도 남편이 굶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교사는 처음 대하는 그들의 삶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

 

‘바나나 그것 다 해도 50달러 어치도 안될 것 같은데, 그것 때문에 내 것 네 것 하고 따져? 그게 무슨 부부고, 무슨 가족이야? 있든 없든 같이 나누어 먹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정글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라는 단어를 모른다. 내 망고, 내 코코넛, 내 파파야…. 그들에겐 나만 존재하지 우리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부부지만 ‘우리’가 아니라 나와 너로 구분되어 있다. 몇 푼 안 되는 망고나 바나나 때문에 소중한 남편을 나와 하나로 만들지 못하고 둘로 갈라놓은 것이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우리’라는 단어 쓰기를 즐거워했다. 우리 동네, 우리 집, 우리 아버지, 우리 아들….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인가? 그런데 요즈음 우리나라 사람들도 ‘나’라는 것이 마음에 강하게 세워지면서 나의 만족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 즉 ‘우리’가 허물어져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곳저곳에서 ‘우리’가 허물어져 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대도시 한가운데서 고독을 느끼는 것도, 어려움으로 혼자 괴로워하며 극단적인 결정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과 마음을 나누지 못하는 것도 ‘나’만 존재하는 삶의 결과다.

 

만일 우리가 모두 ‘우리’를 귀중히 여기며 우리를 위하여 ‘나’를 허물 수 있다면 삶이 얼마나 더 행복해지고 얼마나 더 기뻐질까? 아들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고, 형제의 즐거움이 내 즐거움이 되고, 친구의 행복에 나도 젖을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우리’를 세울 것이다. 그런 세상이 빨리 왔으면 한다.

 

박옥수 

㈔국제청소년연합 설립자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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