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국적의 아버지와 불가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의 이야기는 상당히 인상적이어서, 남경필 도지사의 불가리아 대통령 예방시에도 언급되었다.
한국전쟁 직후 북한은 부상당한 군인들을 요양과 교육 목적으로 여러 동유럽 공산국가들로 보냈는데, 남 교수의 아버지도 그 중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5년 동안 거주하면서 불가리아 정부 장학금으로 소피아대학교에서 공부를 했으며, 부상 치료를 위해 다녔던 재활센터에서 남 교수의 어머니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행복한 결혼생활도 잠시, 남 교수가 2살이 되던 해인 1959년 남 교수 아버지에게 북한 귀국 명령이 떨어져 평양으로 복귀하게 되었으며, 이렇게 남 교수의 가족은 이산가족이 되었다.
북한으로 돌아간 남 교수 아버지는 김책공업종합대학에 교수로 자리 잡게 되자, 불가리아에 남아 있는 부인과 아들을 데려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였고 결국 부인은 북한으로 가서 남 교수 아버지와 눈물겨운 상봉을 한다. 당시 아들인 남 교수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북한에 데리고 가기에는 너무 어렸기에, 어머니는 그를 불가리아 친정에 맡겨두고 홀로 북한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강제 이별을 당했다가 어렵게 다시 만나게 된 부부의 평양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부인이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여러모로 박해를 받았던 남 교수의 아버지는 결국에는 대학교수 자리까지 빼앗겨 북한 사회에서 고립되고 퇴출당하게 되었다. 이에 남 교수 어머니께서는 남편이 당하는 고통을 보고, 2년 만에 불가리아로 혼자 돌아오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불가리아로 돌아온 남 교수의 어머니께서는 원래 소피아대학 지리학과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할 만큼 우수한 인재였기에, 북한 체류기간 동안 수집한 북한 지리에 관한 자료를 정리해서 ‘코리아’라는 제목의 책자를 집필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서적은 불가리아에서 출판되자 북한은 내부의 치부를 드러냈다는 이유로 전량수거, 폐기시켜 현재 이 서적은 딱 2권만 남아 있게 되었는데, 한 권은 불가리아 국립도서관에 있고, 한 권은 남 교수 어머니가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남 교수의 어머니는 불가리아에 돌아온 이후 재혼을 하지 않은 채 남편을 그리워하며 지내왔으며, 아들의 성도 바꾸지 않고 ‘남’씨를 그대로 사용해왔다. 또한, 혹여나 남편에게 해가 될까 북한과는 일체 연락을 끊고 살았다고 한다. 최근에서야 남 교수는 우연히 아버지에 대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는데, 20여 년 전 해외출장을 간다고 하면서 행방불명되었다는 것이다.
남 교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고, 헤어지기 직전 두 살 때 아버지와 찍은 사진만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가슴 아픈 이야기는 이것뿐이 아니다. 불가리아는 한국전쟁 이후 200명의 북한고아를 받아들였으며, 북한이 간부 육성 차원에서 250여 명을 불가리아에 파견하였는데 이중 4명이 북한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자 불가리아는 이들의 망명신청을 받아들였다. 그들 중 마지막으로 살아계셨던 두 분이 작년에 모두 운명하셔서 이제 그 가족들만 남아 있다.
이들의 이야기들을 그저 한 개인의 비극적인 가족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에겐 현대사의 아픔이 생생하게 남아 있기 때문에 불가리아가 조금 더 애틋하고 가깝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오는 8월 카멘 남교수는 경기도 초청으로 꿈에 그리던 아버지의 조국 한국을 최초로 방문한다. 그의 이번 방문이 고난의 삶을 이겨내고 소피아대 정교수로 우뚝 선 남이장군의 후손에게 대한민국이 “나도 이렇게 힘든 현대사를 살아남아 너를 기다렸다”는 뜻깊은 재회가 되고 “비극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바란다.
신부남 주불가리아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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