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론] 장군과 아들과, 6·25 전쟁

송수남.jpg
‘아버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지금 한국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드디어 저도 미력한 힘이나마 보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 조국의 부름을 받고 용감히 나선 나의 승무원들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미 공군 중위 지미 밴 플리트 2세가 6·25 전쟁에 참전하면서 어머니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이다.

웨스트포인트 출신의 이 훌륭한 장교는 1952년 4월2일 압록강 남쪽 순천지역을 폭격하기 위해 출격했다가 실종되었다. 당시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Van Fleet) 장군의 외아들이다.

 

수색작전을 중지시킨 밴 플리트 장군은 며칠 뒤 맞이한 부활절에, 전선에서 싸우다가 전사한 미군의 부모님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저는 모든 부모님들이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다하였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벗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내놓는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1950년 11월26일부터 12월 13일 사이에 해발 2천m대의 낭림산맥이 흘러내리는 개마고원 지대의 장진호에서 미 제1해병사단이 중공군 제9병단 7개 사단의 포위망을 뚫고 철수한 작전이 장진호 전투이다. 12월6일 이 장진호 하갈우리전투에서 해리스 중령이 제1해병사단 제7연대 3대대장으로 중공군과의 격전을 지휘하다가 숫적 열세로 인해 장렬하게 전사한다. 당시 미 해병항공단장 해리스 장군의 아들이다.

 

마크 빌 클라크 육군 대위는 1951년 9월13일~10월13일 철원 금화지구 전투에서 미 제2전투사단 제9전투연대의 중대장으로 중공군과 사투를 벌이다가 3차례나 부상당하고 전역 후 고향으로 돌아가서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제3대 유엔군 사령관 마크 W. 클라크 대장의 아들이다.

 

미국 CIA국장 알렌 덜레스의 아들 알렌 메시 덜레스 2세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다가 6·25 전쟁에 해병으로 참전하여 최전방에서 싸우다가 1952년 머리에 총상을 입고 정신 지체 장애자가 되었다.

 

미 8군 사령관 워크 중장은 아들의 은성무공훈장을 수여하고 전방부대를 시찰하기 위해 의정부로 올라가다가 한국군용 트럭의 난폭 운전에 의한 교통사고로 순직했다.

 

일본에 주둔하던 미 8군중에서 6·25 전쟁에 가장 먼저 참전한 제24사단 연대장 로버트 R. 마틴 대령은 1950년 7월 8일 천안에서 바주카포로 북괴군 T-34 탱크와 맞서다가 탱크가 발사한 직사포를 맞고 가루가 되었다. 미 8군 제9군단장 브라이언트 E 무어 소장은 1951년 2월 24일 한강 도하 작전 공중 지휘 중 헬기가 고압선에 걸려 추락한 후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의 아들 존 D. 아이젠하워 소령은 1952년 6·25 전쟁에 참전하여 미8군 제3사단에 배속됐다. 전선에서 싸우기를 원했지만 대통령의 아들이 포로가 되어 적에게 이용당하는 것을 염려하여 허용되지 않았고 그로 인해서 대통령과 부통령의 자녀가 전투에 나가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생겼다.

 

권력자나 사령관의 자제들이라고, 장성의 아들이라고 그들은 비겁하지 않았다. 인류의 정의 앞에 부모들보다 더 용감했다. 미국은 이름도 모르는 나라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6·25전쟁에 뛰어들어 5만4천246명이 목숨을 잃고 8천177명이 실종됐으며, 10만3천246명이 부상당했다.

 

이것이 6·25의 또 한 면이다! 66년이 흘렀다.

 

호국의 달 6월 어느 날,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앞에서 인천 앞 바다를 바라본다.

 

송수남 前 언론인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