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삐용은 프랑스 말로 나비라는 뜻인데, 주인공 앙리 샤리에르스티브 맥퀸는 자신의 입장에서 볼 때 억울한 죄를 둘러싸고 절해고도에 수감된다.
몇 번 탈출을 시도하고 형벌이 더하여지고 형기가 길어진다.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겼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물에 뜰 것을 만들어 저녁에 그것을 바다에 던지고 뛰어들어가 그것을 타고 해류를 이용하여 죽음의 감옥에서 탈옥한다는 이야기다.
수감 중 어느 날 꿈속에서 스티브 맥퀸이 사막을 걸어 헤매고 있는데 판사들이 일렬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때 스티브 맥퀸은 큰소리로 외친다.
“나는 죄가 없다. I’m innocent!” 이 고함이 공명되어 사막에 흩어졌다. 적막한 침묵이 무겁게 이어졌다. 침묵을 깨뜨리면서 판사가 준엄하게 말한다. “당신은 시간을 허송한 죄로 기소되었다.” 스티브 맥퀸은 침묵에 잠겨 있다가 슬프고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독백한다. “그래, 나는 죄인이다. So, I’m guilty!” 무엇이 스티브 맥퀸으로 하여금 시간을 허송하게 하였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꿈 목표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영화의 기억은 지금까지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어느 면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죄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학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기울이는 관심과 배려의 질에서 시간 낭비라는 죄를 저지르기 일쑤이다.
우리 자녀들에게 시간을 쏟고 사랑과 정성을 쏟은 만큼 자녀들은 성장한다. 학원비와 과외비만 주면서 공부만 잘하라고 윽박지르지 않았는지, 자녀와 대화하며 자녀가 공부할 때 옆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모습으로 다가간 적이 몇 번이나 있었는지 생각해 볼 때이다.
가난해도 어느 방이나 마루 공간에 책상과 공간을 만들어 주고 수시로 들여다보며 사랑을 나타냈는지 돌이켜봐야 한다.
두 번째로, 학부모, 당신에게 물을 수 있는 과오는 자신의 인생에서 주연이 안 되고 조연이나 엑스트라로 머물러 있는 죄이다.
우리 학부모들은 큰 착각 속에 살고 있다. 자녀들에게 보통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들아, 딸아, 내가 너희들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일해 돈을 버는 것은 너희들의 교육비를 아낌없이 지원해 주기 위함이 아니겠니? 너희는 나의 희망이고 꿈이다.
나는 너희들을 위해 백화점 옷 한 번 사본 일이 없고, 맛있는 고급요리를 마음 편히 먹어본 적도 없다. 그러니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 것 아니겠니? 너희들이 잘돼서 꿈을 이루어야 할 것 아니겠느냐?”라고 말이다.
듣기에는 이해가 가는 말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소원한다고 하여 자녀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가? 꿈을 이루어 주는가?
자녀들이 어떻게 부모의 원대로만 되는가? 그렇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녀가 꿈을 이루려면 부모가 자신의 꿈을 이루어나가야 한다. 자신의 나이가 많다고 해서 뒷방으로 조연처럼 물러나 앉아서는 안 된다. 죽을 때까지 무엇인가 목표를 세우고 이루어나가야 한다. 그럴 때 자녀들이 그것을 보면서 스스로 자신의 꿈을 이루어 나가는 것 아니겠는가.
만일 당신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시간과 자녀들이 꿈을 이루도록 배려하는 시간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허송세월한 후 조연으로 주저앉아 인생을 끝내려고 한다면 <빠삐용>의 스티브 맥퀸처럼 “I’m guilty. 나는 죄인이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부모들의 모든 초점이 자녀에게만 맞추어져 있고, 자녀의 성공을 위해 본인의 행복을 포기한다면 그것이 진정한 행복일까? 아이와는 별개로 부모도 자신만의 비전을 가지고 스스로도 행복해야 한다. 지금 부모가 비전을 가지고 스스로 행복하려는 노력을 해야, 아이가 행복을 느끼고, 행복한 아이가 꿈을 꾸며 성공하게 된다.
“배를 만들게 하고 싶다면 일을 지시하고 일감을 나눠 주지 말고, 넓은 바다에 대한 동경심을 키워 줘라.”라는 생텍쥐페리Saint - Eyupery의 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송하성 경기대 교수·한국공공정책학회장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