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인터넷’이라는 말이 너무 익숙해져 있다. 굳이 사전적 의미를 설명하지 않아도 그 단어가 주는 힘과 편리함, 합리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삶이 이루어 있다. 굳이 미디어의 현재와 오늘을 비교하지 않아도 우린 현재 ‘인터넷’이라는 생활과 문화의 풍요로움을 익히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이상하게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찾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 지는 것도 사실이다. 너무 많은 정보 속의 진실과 사실을 가려 읽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이 비단 나만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국제시장’이라는 영화가 대한민국에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고 한다. 그 신드롬으로 부산 국제시장은 때아닌 제2전성기를 누리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그 영화가 진한 향수로 많은 사람의 관심과 호응을 이끌어 냈지만, 이런저런 논란과 논쟁이 있었던 이유는 세대 간의 공감만큼 세대 간의 다름이 너무 크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학교를 한 시간 이상 논두렁 길을 가로질러 걸어가서 ‘오라이’를 외치는 안내양을 바라보며 버스를 타고 학교를 가야 했다. 혹여 소나기가 오면 까까머리에 교복이 흠뻑 젖어도 가방을 가슴에 품고 열심히 뛰어야 했다.
너무 옛날 얘기가 되어버린 게 ‘가방 없는 초등학교’라고 해서 어느 사립초등학교는 가방 없이 학교에 등교해 모니터를 보며 수업을 하고 이메일로 숙제를 제출한다고 하니 같은 시간과 공간에 있어도 세대 차이는 더욱 벌어지는 것만 같다.
대한민국의 최고로 높은 빌딩이 63빌딩이었던 시절에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이야기를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을 것 같다. 스마트폰, 노트북, 하이브리드라는 단어들.
지금 손에 쥐어진 스마트폰의 경이로움을 느끼기보다 당연한 신체의 한 부분처럼 손을 떠나면 불안하고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는 곳에 가면 마치 자기 가슴이 답답해 터질 듯이 느끼는 젊은이가 더 많은 것 같다. 이런 세상에서 아파트 벽 건너편 이웃은 누구인지, 어쩌다 현관을 나가 마주치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은 왜 이리 불편한지 생각해 봐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지식을 쌓는 것보다 함께 사는 지혜를 구해야 한다고 교과서처럼 미디어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녹녹치 않은 하루살이와 세상이 던지는 피곤에 눌려 자신에 대한 여유와 시간을 누릴 사치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는데 그런 이야기가 가슴에 남지 않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틈틈이 보는 지구 반대편 이야기를 통해 주식이 떨어지는 건 보이는데, 옆집에 있는 아이가 장애를 겪고 있거나, 외로운 독거노인이 살고 있는 건 보지 못한다면 과연 그런 핑계만으로 내 마음이 편안해 질까? 한쪽만 보이는 마음의 시각 장애로 가족 안에 있어도, 이웃과 함께 있어도 외롭거나 고독하지는 않을까? 그 시간의 편식은 나이가 들수록 나를 더욱 외롭게 하지 않을까?
그래서 그 외로움을 함께해 줄 친구를 소개해 주고 싶다. 사람들은 그 잊혀 가는 친구 이름을 ‘책’이라고 부른다.
때론 나와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로 즐겁게 하고, 때론 대신 아파도 하며, 때론 어릴 적 소중했던 잊었던 내 꿈을 말해주기도 한다. 그 친구는 언제나 너무 멀리 있지도 않고, 내가 어디를 데려가도 불평이 없다.
내 소중한 사람에게 소개해줘도 아깝지 않으며, 되려 맘이 뿌듯하고, 설령 내가 신경 못 써 소홀히 해도 서운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평생 옆에 두고 있어도 한 번도 잔소리를 하지 않는 게 매력이다. 어떤 때는 곁에 두고만 있어도 사람들이 그럴싸하게 친구를 두었다고 부러워하기도 하는 친구.
손바닥 안에서 많은 것을 할 수 있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영화는 극장에서 보려 한다.
‘기브 미 더 초콜렛’을 외치던 시대에서 스마트폰의 앱을 열어 맘껏 골라 먹는 먹는 시대가 되었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아직도 누가 무엇을 먹는지보다 누가 무엇을 말하는지 더 궁금해한다.
떨어지는 주식보다 멀어지는 주변의 관심이 더 가슴 아플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될 때 지금 소개한 친구가 항상 곁에 있음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하명국 인천시 상수도사업본부장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