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 패션상품과 포도주로 상징되는 자본주의적 국가 이미지와는 달리, 이탈리아는 정치적으로 좌파주의의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1975년 유로코뮤니즘이 처음 탄생한 것도 이탈리아였고, ‘붉은 볼로냐’라 불리는 이탈리아 중부의 대도시 볼로냐는 현재도 유로코뮤니즘의 메카이자 조합주의 운동의 세계적 중심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현재 이탈리아 정부는 민주당의 렌치 총리를 필두로 좌파연립내각이 정권을 잡고 있고, 이탈리아 최대의 자본주의 도시 밀라노의 피사피아 시장은 구공산당 출신이다.
사회주의적 전통에 따라 높은 수준의 사회보장이 이루어지고 있어, 약 320만 명에 달하는 공무원 중 교육공무원이 100만 명이 넘고, 국가가 고용한 의료공무원이 무려 67만 명이다. 이러한 사회보장의 유지를 위해 봉급생활자들은 매월 받는 봉급의 거의 40%를 세금과 사회보장 부담금으로 국가에 납부하고 있다.
이러한 이탈리아에서 요즘 국가체제의 비효율성, 비대화된 공공행정, 관료주의와 과도한 규제, 부패, 탈세 등 고질적인 ‘이탈리아병’을 고치겠다는 기치를 내걸고 집권한 젊고 박력이 넘치는 렌치 총리에 의한 개혁 드라이브가 자못 대단하다.
이탈리아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경제위기의 와중에서 다수 국민들의 이해와 지지 속에 진행되고 있는 개혁의 강도와 심도는 가히 대처 총리가 ‘영국병’을 고치던 시절처럼 광범위하고도 파격적이다.
그런데 구체적 개혁의 내용들을 보면 좌파연합 정부의 개혁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정책들 일색이다. 노동시장의 유연성 강화를 위한 노동개혁, 중앙정부 조직 축소와 공무원 감축, 공기업의 대대적 민영화와 통폐합, 우체국 민영화, 지방자치단체의 조직 및 권한 축소, 기업에 대한 면세 확대 등 어느 모로 보나 전형적인 우파정부의 정책들이고, 더욱이 과거 이탈리아의 어느 우파 정권도 감히 추진하지 못했던 파격적인 개혁들이다.
렌치 총리는 심지어 입법부의 효율성과 예산절감을 위해 상원을 폐지하는 헌법개정안까지 밀어붙이고 있는데, 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이 어찌나 큰지 이에 반대해야 할 처지인 상원의원들 조차 내놓고 반대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개헌안은 이미 상하원을 통과했고, 이탈리아 헌법에 따라 상원과 하원을 한 번씩 더 통과한 후 국민투표에 회부될 예정이다. (개헌안이 상하원에서 각각 두 번씩 통과된 후 국민투표에 회부되는 규정은 헌법의 졸속개정을 막기 위한 방어장치로 보인다.)
렌치 총리는 개혁의 성공 여하에 이탈리아의 명운이 걸려 있음을 강조하면서, 이를 통해 ‘이탈리아병’을 극복하고 이탈리아에 대한 국제사회의 오랜 불신을 해소해야 한다고 국민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대다수 정치인들은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절박한 국민적 합의를 감안하여 이에 적극 편승하거나 또는 차마 반대는 못하고 자의반타의반 따라가고 있는 양상이다.
물론 개혁안들 중에는 노조 등 집권당의 핵심 정치기반을 심각하게 잠식할만한 사안들이 많고 좌파연합 내부의 반발도 적지 않다. 또한 개혁의 강도가 워낙 강한 관계로 이해관계자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아, 궁극적인 성공을 낙관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개혁의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렌치 총리가 이념과 정치적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조국의 미래를 위해 추진하는 애국적인 개혁은 정치의 본질과 사명에 대한 많은 성찰을 하게 해 준다. 이념과 국익 사이에 위태롭게 선 그의 용감한 정치적 도박이 부디 성공하기를 빈다.
이용준 주이탈리아 대사•前 경기도 국제관계대사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