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70년을 맞이하는 대한민국에 수많은 행사가 기획되고 전국 주요도시에서 열리고 있다. 당연히 경축하고 기뻐하며 그날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고 반성하며 미래를 열어야 한다.
당분간은 수많은 매체와 기관들이 다투어 다룰 테니 필자는 이 기쁜 날에 다소 우울한 젊은 예술가들의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려 한다.
지난 6월에 우리 예술계는 두 명의 젊은 예술가들을 속절없이 저세상으로 보냈다. 무명의 연극배우 김운하가 고시원에서 가난에 시달리다 지병을 치료하지 못한 체 쓸쓸히 죽어갔고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독립영화계의 주목받던 배우 판영진이 힘들다는 문자메시지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2011년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이 생활고로 세상을 등지며 젊은 예술가들의 삶이 조명되는 듯했으나 문화사각지대의 젊은 예술인들은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필자 또한 연극인으로 평생을 살아가고 있으니 그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나 또한 젊은 연출가 시절 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하며 잡일로 생활비를 벌었고 정작 연극으로는 언감생심 수입은커녕 지출이 훨씬 많은 처절한 연극 인생을 겪어왔다.
하지만 이미 연극을 선택한 순간부터 수 없이 들어왔던 말들 “연극하면 배고프다” 라는 고유명사화 돼버린 언어를 접하고도 내가 선택한 일이니 힘들어도 버틸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것은 필자의 선배들이 겪고 필자가 겪은 그 고생들을 후배들이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이 땅에 신 연극이 들어온지 100여 년이 되지만 모든 것이 변함에도 배고픈 연극인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유를 얻기가 그리 간단치는 않겠지만 오랫동안의 예술에 관한 나라의 무관심과 무지 거기에 더해 예술인들의 목적만 있지 생활은 없는 어쩌면 무관심의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전통극이라 할 수 있는 탈극 인형극 그림자극 창극 등이 자료도 부족하고 명맥만 겨우 유지하는 이유는 배우의 직급이 너무나도 낮았고 천하게 여겼으며 나라에서 연극을 관장한 기관도 조선시대 산대도감 정도 그것도 잠깐일 정도로 관심을 얻지 못하였음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배우라는 직업이 천대받고 가난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 스스로 만들고 당연함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모르겠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신연극도 유학생 몇몇에 의해 주도되었고 그것도 주로 초창기에는 민초들의 눈을 어둡게 만드는 최루성 신파극에서 친일 국민극 까지 일제정책의 수단으로 많이 이용되어 진정한 예술과 복지 환경 등을 같이 생각하며 오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해방 후에도 연극은 좌우로 나뉘어 갈리게 되었고 삶의 질보다는 이념논쟁을 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 625전쟁과 더불어 국립극장과 국립극단이 탄생하고 60년대 이후에는 여러 극단과 예술가들이 대거 등장한다. 이 즈음은 배고픔에 대한 예술가들의 성찰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가난했고 먹고살기 바빴으니 예술가들이 물질적으로 풍족함을 생각하기에는 사치였을 것이다.
광복70년을 맞는 지금 위정자들은 문화융성을 얘기하고 한류를 숭배하며 문화강국을 외쳐대고 있지만 정작 젊은 대부분의 예술가의 삶이 어떠한지는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것 같다. 중요예술의 창작인들 70% 이상이 달에 백만 원 미만의 수입을 얻고 문화복지에는 희귀한 규정들로 인해 거의 대부분이 혜택을 못 받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회당 수천만 원을 버는 한류스타 또는 대형스타들의 주머니를 채우느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희생당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위정자들은 문화 복지의 낮은 곳을 봐야한다. 청년실업 해결의 첫 걸음은 평등한 기회부터 시작해야 한다.
장용휘 수원여대교수•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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