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입맛이 평생 간다. 지극히 평범하고 상식적인 말이다. 지금의 어린이들에게 파스타나 피자가 입맛이라면, 적어도 나이 오십 이상의 평범한 사람은 자장면 맛이 평생 입맛이다.
요즘 먹을거리 방송이 인기이고 입맛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예전에는 맛보다는 끼니였다. 끼니에서 맛으로 변한 것은 양에서 질적인 사회 변화로 해석할 수 있다. 지금 유행하는 입맛 방송은 곧 다른 유행으로 대치하게 될 것이다. 방송은 유행이지만 어려서 입맛은 변함이 없다.
어려서의 입맛처럼 평생 가는 것은 없을까? 예술을 예로 들 수 있다. 예술 또한 어려서 경험이 평생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국의 문화정책은 이러한 경험을 제공하는 것에 소홀하였다. 뿐만 아니라 예술기관의 활동과 학교 교육은 별개의 영역으로 여겨졌다.
학교는 학교고 미술관은 미술관이었다. 어려서 미술관을 가고 전시를 본다는 것은 특별하고 드믄 경험이었다. 더욱이 학교의 단체관람을 제외하면 가족이 전시를 관람한다는 것은 생소한 일이기까지 하다.
부득이 학교 숙제를 하기 위해 엄마 손에 이끌려 미술관을 찾는 경우는 있어도, 미술관 전시 관람을 가족 나들이로 삼는 경우는 생소하다. 그런 일상에서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미술관 관람객이 애호가 단위 보다 가족이 관람하는 문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어려서 가족과 함께 미술관을 찾는 경험을 가진 어린이를 미술관 키드라고 한다면 미술관 키드와 이전 세대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런 가정도 가능하다. 규칙세대와 창조세대. 그런데 우리는 창조를 쉽게 생각하고 어려서부터 경험하고 몸에 체득된 자산으로 축적될 기회도 주지 않으면서 창조를 기대한다.
그리고 조급하다. 창조의 열매를 보려면 적어도 미술관 키드가 자라는 십년, 이십년의 시간이 필요한데, 우리는 급한 나머지 창조에다가 더하여 경제까지 욕심을 낸다. 그것도 이삼년 내에 성과를 기대하며.
창조성은 미술관을 예로 들었지만, 체험하는 모든 것들이 자산이 될 때이다. 창조를 키우는 예술적 체험은 자연스럽고 즐기는 가운데 체득된다. 그럼에도 체험이 또 다른 교과목이 되어 체험에 내모는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강요받은 체험이 살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체험의 내용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 원로 박물관장의 ‘ 체험 교육이 어디를 가나 점토로 만들기부터 다 똑 같다.’ 라는 지적은 뼈아프다. 예술체험 교육이 살아 있는 교육이 되기 위해서는 각각의 미술관, 박물관이 고유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특색 있는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학교와 미술관이 벽을 허물어 미술관이 제2의 학교가 되고, 학교가 이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학교도 미술관의 전문 교육 프로그램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단지 미술관의 교육 강사가 교수 급이어서 학교와의 교육 협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미술관의 교육은 전시와 연계하는 생동감이 있고 다양한 변화를 특성으로 할 뿐 아니라 미술관의 분위기를 낯익게 느끼는 것 자체가 더 중요한 교육이다.
미술관 키드에게 필요한 것 중의 하나가 지속적인 성장이다. 어려서의 경험에 그치지 않고 어른이 될 때까지 생활화하는 성장 과정이 중요하다. 그리고 어른의 예술의 생활화는 준거 동료가 있을 때 가능성이 높으므로 같은 또래의 동반 성장이 도움이 된다.
예술교육은 인적자원 형성을 위한 인프라 구축이다.
양평은 향후 십년 뒤, 이런 인적자본 축적이란 측면에서 미술관 이전 세대와 미술관 키드 세대로 구분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해 본다.
이철순 양평군립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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