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열심과 열정 사이

두메산골에서 화전민의 딸로 태어나 농사일만 하던 소녀가, 서울에 가정부로 오게 되었다. 소녀는 첫날부터 마당에 가득한 풀을 보고 걱정이 태산이었다.

3일째 되던 날, 주인이 외출하고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착한 일을 시작하였다. 쇠꼬챙이로 질긴 풀뿌리를 뽑아내느라 온몸이 땀에 젖었고, 손에는 물집이 생겨 아팠지만 멈추지 않았다. 오후 4시쯤 작업이 끝났다.

자기가 한 일을 칭찬해줄 주인을 기다렸다. 집에 돌아온 주인은 그동안 정성들여 가꾼 잔디가 모두 뽑혀진 것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잔뜩 칭찬을 기대한 소녀에게 돌아온 것은 주인의 심한 꾸중뿐이었다. 힘을 다해 일하고 꾸중을 들은 소녀는 억울해서 울었다. 농촌문화와 도시문화의 충돌이었다.

착한 마음 하나만으로는 좋은 일꾼이 될 수 없다. 뚜렷한 목적과 방향이 없는 지식 없는 자의 무분별한 열심은 오히려 일을 망친다. 열심은 내 고집이고, 거만이고, 이기적인 나 중심의 사고이다. 때문에 이러한 열심은 득이 아니라 해가 되기 일쑤이다.

열심과 다른 열정은 무엇일까?

열심은 ‘해야 만하는’ 당위성과 책임감으로 충분히 할 수 있다. 또한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맹목적 부지런함이다. 그러나 열정은 자기중심적이지 않다. 뚜렷한 목적과 방향을 알고 최선을 다한다. 하고자 하는 것의 이유와 의미를 알고 있기에, 그 결과도 아름다울 수 있다.

열정은 내면의 뚜렷한 목적에 대한 깊은 에너지를 발산시키는 과정이다. 일에 대한 정열, 애착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열정을 통해 성숙한 삶, 보람된 삶을 추구하고 좌절을 이겨낼 수 있는 힘도 생긴다. 나와 공동체 속에 있는 정의가 그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열심은 자기만족만을 위한 최선도 가능하다. 그러기에 나의 열심이 다른 사람의 고통과 불쾌감을 줄 때가 곧잘 있다. 그러나 열정은 모두의 행복을 위하여 최선을 다한다. 때문에 나의 열정으로 다른 사람도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열정은 분명히 필요하다. 그러나 그릇된 목적에서 출발한 열심을 열정으로 오해하여, 나의 주장과 방법을 강요하는 아픔이 곳곳에서 들린다. 우선 우리는 나의 애쓰는 땀 흘림이 열심인지 열정인지 분별하는 지혜가 선행되어야 한다. 때론 나의 열심이 유익할 것이라는 오해로, 많은 이들을 아프고 불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네팔 지진으로 많은 이들이 아픔과 고통에 처해 있다. 이 고통은 비단 피해를 입은 네팔만이 아니라, 전 지구촌의 아픔이기도 하다. 때문에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고통을 나누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돕는 손길을 펼치고 있다.

기독교는 사회적 종교이어야 한다. 때문에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본성인 사랑을 나누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여러 기독교 단체들이 네팔 지진 피해 돕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여기까지는 좋다. 분명히, 그리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교와 구제를 분별하지 못하는 일부 기독교인들이 있는가 보다. 그 현장에서 기독교인들은 선교하기 위한 삶이 아니라, 구제하기 위한 존재로 있어야 한다.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상처를 싸매주며, 굶주림을 배부름으로 바꾸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일부 기독교인들이 그곳을 선교 현장으로 만들어, 위로가 아닌 전도지로 정신적 지진을 일으키고 있다는 소식이 필자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예수님도 아픔과 고통이 있는 곳에 치유를 나누었다. 그런 후에 그들이 그 위로 속에서 느끼는 사랑을 필요로 할 때, 복음을 전했다.

필자는 그들과 함께 현장에 있을 용기가 없다.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아픔을 공유하며 나눔을 갖는다. 감히 현장에 있는 기독교 구제 단체에 권한다. 진정으로 사랑만을 위하여 지극히 작은 자의 배고픔과 목마름, 그리고 아픔을 어루만져 주기를 제안한다. 앞선 이야기처럼 문화적 충돌로 인하여 또 다른 아픔을 그곳에 심는 일이 없기를 소망한다.

이길용 이천 새무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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