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적할 땐 영화만한 게 없다. 눈 뜨면 사건 사고 소식이요, 문 밖에 나서면 대기를 덮은 부연 미세먼지가 심란한 세상을 은유하듯 앞을 가린다. 그렇다고 숨어 은둔하기엔 삶이 절박하다. 확충된 사회관계망(SNS)은 좋든 싫든 다양한 정보를 쏟아 놓는다.
생명존엄은 어느 짝에 버려졌는지 찾을 길이 없고, 바닥을 치는 내수경제는 하루 벌어 사는 자영업자들의 탄식을 부르는데, 부패는 왜 그다지도 창궐하는 것일까. 터졌다 하면 온 나라가 들썩거린다.
와중에도 계절의 순환은 어김없고, 고통과 체념을 달고 사는 시민들에겐 올해의 4월도 잔인하기 이를 데 없다.
이런 세상인데 문화의 치유력마저 없었다면 어땠을까. 오히려 경기 어려울 때 영화흥행 실적이 좋아진다는 통계가 있다. 예술의 순기능을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예라 하겠다.
현실에서 인본에 충실한 따뜻한 미담을 보고 듣기 어려울 바엔 픽션의 세계에서라도 감동과 위안을 얻고 싶은 게 당연한 이치다.
큰 돈과 시간 들이지 않고도 의미 있는 삶의 드라마에 동참하고자 하는 소박한 바람이 있어 극장이 좋다. 악의 편인 누군가를 응징하고 싶으나 행동으로 옮길 수 없는 소시민이라면 액션영화가 있다.
남녀상열지사의 주인공으로서 생의 의미를 반추하고 싶은 사람들은 멜로드라마로 위안을 얻고, 위인 부재의 시대에는 영웅담을 찾는다. 영화이기에 가능한 대리체험이다. 다양한 관심과 목적에 따라 우리 주변에 산재한 스크린을 골라 선택하면 제한적이나마 답을 얻을 수 있다. 영화의 사회적 치유력이 새삼 고맙다.
어떤 경우에도 가치 있는 영화에는 진실성이 전제된다. 일전의 <워낭소리> 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두 다큐멘터리 영화의 엄청난 흥행성공 사례는 우리가 진실에 얼마나 목말라 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님아> 워낭소리>
실존의 삶이 주는 진정성을 반추하며 인생이 무엇인지, 우리 민족의 유전인자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자신의 존재성을 진실 또는 진정성의 범주에 넣어 성찰해 보는 것이다.
<명량> 과 <변호인> , <광해, 왕이 된 남자> 의 흥행성공도 다르지 않다. 이상향에 목마른 사람들이 극장을 메우고, 현실에서의 상실감을 벌충하며 일시적으로나마 위안을 얻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보여준 진정성이 시대를 넘는 감화력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들은 제작진에게 남긴 성취감과 이윤의 크기 이상의 가치를 관객들에게 선물한 것이다. 광해,> 변호인> 명량>
횡행하는 권력 앞에 위축되고 탐욕에 눈먼 사회에서는 희망을 찾을 수 없다. 보편적 가치의 외면이나 윤리성의 실종 현상을 산업사회의 어쩔 수 없는 단면으로 이해하고 눈 감아 버린다면 인간이 금수와 무어 다르겠는가.
영화가 이를 환기 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때문에 영화인들이 갖는 존재성은 소중한 우리의 자산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해서 배고픈 다수 영화인들의 허기가 채워지진 않겠지만 말이다. 꽃망울 펼친 라일락의 향에 기대 잠시 휴식을 취해보는 4월의 끝자락이다. 분노와 환멸의 한숨에 더하여 인간 본질에 대한 질문 앞에 괴로웠던 4월이 지나가고 있다.
일찍이 아놀드 하우저가 영화의 시대라고 정의했던 현대의 시대성은 21세기 초반인 오늘에도 유효하다. 잠시라도 시름을 잊고 싶을 땐 가까운 극장으로 가는 것이 어떨까? 4월이 다 간다 해서 잔인한 시간이 완벽하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가 주는 치유의 힘이 소중하고 고맙다.
김영빈 인하대 교수∙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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