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심층적 공감이 필요한 시대다

제러미 리프킨의 저서 ‘공감의 시대’를 보면 18세기 후반 유럽에서는 부유한 집안의 엄마들은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것이 내키지 않아 아기를 낳자마자 주위의 가난한 사람에게 맡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몸매를 유지하고, 사교생활을 방해받지 않기 위해 엄마로서 가장 기본적인 역할마저 포기한 것인데, 이로 인해 아동 학대는 물론 숨지는 일도 잦았다.

이후 부유한 사람들은 자녀 양육에 대한 중요성 때문에 직접 돌보았으나, 하류층 사람들 사이에서 유모에게 아이를 맡기는 풍습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최근 어린이집 원아 폭행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어 국민의 공분(公憤)을 산 적이 있다.

아이들의 양육에 대한 관심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갖고 있는 사안이다 보니 어느 때보다 주목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뉴스가 사회의 가장 약자 중 한 명인 보육교사를 상대로 국민들로부터 사디즘(sadism)과 같이 가학적인 경향을 유발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도 받았었다.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은 앞서 말한 유럽의 상황과 비슷하다. 첫돌이 채 지나기도 전에 아이 양육을 주위에 위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집에 들어가기가 대학입시 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밤샘하거나 추첨을 통해서라도 아이들을 외부에 맡기려 애를 쓰고 있다.

당첨되면 자식을 다른 곳에 맡기게 되었다고 좋아 울고, 안 되었다면 슬퍼운다. 이처럼 집단적으로 양육하는 종(種)은 인간밖에 없을 것이다.

전문가들은 자녀들이 포근하고 안정된 느낌을 받지 못하고 자라면 자의식은 억눌리게 되고 성장해서도 사람과 깊이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관용과 배려는 타고난 성격보다는 후천적인 교육의 영향이 더 크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느냐는 어릴 때 어떤 관계를 경험하는가에 따라 달라지는데, 부모의 사랑 없이 외부에 맡겨진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나중에 다시 보육교사로 직업을 얻게 되고, 결국에는 오늘날과 같은 일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한편 자녀 학대는 대부분 해당 자녀의 부모에 의해 일어난다. 정작 분노해야 하는 것은 어느 정도 학대에 대한 통제가 되는 제도권에 있는 어린이집의 경우가 아니라, 집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동학대다. 그리고 어린이집 학대는 분노하면서 스스로 자행한 학대는 합리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이번 어린이집 아동 학대는 보육교사 한 사람의 개인적인 성향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부분도 있다. 보육교사의 현재 처우나 보육 스트레스도 생각해 봐야 한다.

사람도 생물적인 존재로 보면 보육에 대한 스트레스가 반복되는 상황에서 지속적인 사랑과 공감을 아이들에게 매번 똑같이 주는 것은 쉽지 않다. 정서가 메말라 가는 일종의 ‘공감 피로증’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보육교사 등 감정노동자들에게 대한 표면적인 공감이 아닌 표현되지 않은 마음의 상태까지 알아주고 이해하는 심층적인 공감이 필요하다.

마디가 생기면서 나무는 크듯이 이번 일을 계기로 조금씩 밝은 사회로 나아갔으면 한다.

임창덕 경영지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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