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죽는다는 것

우리는 매일 조금씩 죽음을 향해 가면서도 죽음을 잊고 살다가 누군가의 임종 소식을 접할 때마다 가슴 속에 오래도록 찬바람이 분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는 겸손함으로 삶을 성찰하게 된다.

일전에 작고한 배우의 보도를 접한 그의 팬들은 제각각 한 마디씩 한다.

“안 됐다, 아유 예쁜이도 가는구나, 하나님이 부르면 누구나 가는 건데, 참 상냥하고 연기도 잘 했는데, 63세이면 너무 젊은데, 좋은 곳으로 가서 편히 쉬겠지”등 죽음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 상황임을 기정사실화 하면서 애석해 하는 심정을 읽을 수 있었다.

남모르는 투병 끝에 홀연히 다시 돌아오지 못 할 저 세상으로 갔다. 누구도 떠나야할 죽음을 우리는 그 단어 자체를 유독 꺼려한다. 그만큼 이 세상 이별은 아픈 상처라고 남기 때문일까.

인생은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치게 마련이다. 100세 시대라지만 누구도 자기의 떠날 날을 가늠할 수는 없다. 그래서 ‘웰빙’(Wellbeing)에서 ‘아름다운 죽음’(Well dying)을 준비하려고 애쓴다. 어느 땐 죽을 거면 왜 태어났을까? 자문도 해 본다.

어차피 다가 올 죽음을 맞이할 때 고통 없이 가기를 원하나 조물주가 인간을 값지게 하기 위하여 마지막 죽음을 마련하였고, 그 마지막을 편하고 적절하게 하기 위하여 이에 알맞은 병을 준비한 것이 아닌가.

요즘은 곳곳에 죽음학 수업, 죽음 체험학습도 있다. 이게 세계적 추세이다. 죽음을 위한 공부다. 과연 죽음을 공부하여서 사경을 헤맬 때 행복한 임종을 할 수 있을까? 모두 의문이다. 유언장 쓰기로 상속이며 연명치료 중단까지 자손에게 알리는 경우가 점점 늘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바라기는 병실에 눕지 않고 가기를 바라지만 어디 그것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다. 어떤 의사는 인생 끝이라는 신호가 오거든 과잉 연명치료를 피하는 것도 괜찮다고 권한다. 그러나 연명치료 거부나 안락사는 법적인 문제라서 조심스러운 사항이다.

어떻게 보면 인간은 일생일사인 바 안락사(安樂死-Euthanasia), 존엄사(尊嚴死-Death with dignity)를 고려해 볼만하다는 생각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즐겁게 지낸 하루는 단잠을 주듯 좋은 인생은 좋은 죽음을 맞는다고 했다” 이왕에 태어났으니 인간답게 살다가 거룩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최후 소망일 것이다.

창조주의 소관인 생사화복에 항변할 자 없다. 자연의 섭리에 맡게 영생의 길을 모색하는 믿음이 현명하다 하겠다. 소크라테스도 “육체는 죽을 지라도 영혼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며 영혼불멸을 믿고 독배를 마셨다고 한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경외함으로 나의 본향 천국에서 영생한다 하였으니 또 하나의 신비한 세계로의 여행을 떠나보자.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고 열심히 살다가 허락한 생을 마치는 날 고통 없이 떠나기를 원하노라.

오범세 前 인천청천초등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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