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내가 걷는 이유

나처럼 복 받은 사람이 있을까? 내가 다니는 회사 바로 옆에는 수원천이 흐르고 있다.

짬이 날 때마다 이곳을 걸으며 사색에 잠긴다.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 온갖 나무들은 가을색이 완연하다.

사무실에서 이것저것 고민을 하다 보면 갑자기 머리가 무거워지고 뻐근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이곳을 향한다. 수원천은 팍팍한 도시살이에 지친 마음을 씻어내는 안식처가 되기에 충분하다.

저수지 뚝방 밑에 잘 갖춰진 운동기구들은 움츠렸던 나의 몸과 마음을 활짝 펴 주곤한다.

1시간여 걷다 보면 머리를 짓눌렀던 상념들이 사라지고 머리가 맑아지고 후련해진다.

‘인생사 너무 서두를 것도 없고, 서두른다고 될 일도 없고, 일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이라는 멘토의 말이 머릿속에 아른거린다.

과거 같으면 치열한 삶 속에서 도피하듯 방관자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살고 싶다. 전장에 서 있는 장수의 기백처럼….

이렇게 걷기운동을 자주하는 것은 스트레스 해소 차원뿐만 아니라 나는 선천적으로 관절이 약하기 때문이다.

“나의 두 다리가 의사”라고 강조한 우리나라 걷기운동의 창시자가 한 말을 듣고 우연한 기회에 수원천변을 걷다 ‘이거다’ 싶어 계속하게 됐다.

지난 주말엔 강원도 정선의 억새밭에 다녀왔다. 가을바람에 살며시 일렁이는 억새의 춤사위가 마치 나를 반기는 듯하다.

내가 두발로 걸을 수 있다는 거에 행복감을 느끼며 숨을 고른 채 올라가는 양옆에는 오색 향연의 단풍이 펼쳐져 있었다. 난 그곳을 바라보며 외쳤다.

“나는 할 수 있다” 갑작스런 외침에 주변 행락객들의 눈길이 모아진다. 가벼운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다.

하산길, 바삭바삭 낙엽 밟는 소리, 주변 온갖 풀내음, 흙내음이 한데 어우러져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짙은 가을향기가 내 온몸을 정화해주는 것 같은 느낌이다.

집으로 향하는 시골길 양옆으로 알차게 영근 채 누렇게 패여 고개를 떨군 벼이삭이 나에게 ‘겸손하게 살라’고 주문하는 것 같다.

사람이 걸을 때면 우리 몸에서 세로토닌 분비가 활성화 된다고 한다.

세로토닌은 뇌의 시냅스에서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로 인간의 감정을 조절하여 행복하고 역경을 이겨 성공하는 뇌로, 살맛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걷는다는 것, 외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늦깍이 학생이 되어 캠퍼스에 가는 날, 강의시간이 남아있을 때는 캠퍼스를 무작정 걸으며 젊음의 기운을 만끽한다. 대학졸업한 지 어언 30년, 목적의식, 책임감 없이 살아오면서 본의 아니게 주변 사람에게 누를 끼치고 살아온 세월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짙노란 단풍, 울긋불긋 이어진 단풍의 향연은 마치 색동옷을 입은 아이들을 연상시킨다. 나 자신과의 대화, 오색단풍과의 대화, 그리고 또하나. 이번 주말에는 아이들 손을 잡고 집 근처 수변공원을 함께 거닐며 그동안 못다 한 대화를 나눠 볼 생각이다.

신동협 한동건설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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