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타자와의 마주침

‘현대’라는 것은 역사적 연대기 상의 고정된 한 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롭게 되려는 노력의 표현’을 지칭한다. 현대미술 역시 그렇다. 현대미술은 단지 동시대라는 시기에 국한되어 있는 미술행위를 일컫는 말도 아니다. 현대미술은 현대라는 시기의 삶이 생각하도록 요구하는 문제들에 미술이 밀착하고 대응하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철학이나 미술은 유사한 과제에 시달린다. 철학과 미술은 사유하고 실천하는 일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그것은 인간의 삶 전반에 최대한 밀착하려고 시도한다.

더불어 현대미술이란 현재의 삶과 문화에 대응하는 미술이자 고정된 관습이자 통념에 저항해 늘 새로운 표현과 어법을 만들어내려는 시도이다. 전통사회에서 이미지제작행위란 나란 주체와는 무관한 채 당대를 지배하는 종교와 이데올로기에 복무하거나 지배계급에 종속된 도상화라고 부를 수 있다. 그것은 미술이 아니라 주술적 물건으로서의 이미지제작이다.

반면 현대미술은 이른바 탈주술적 이미지다. 그것은 종교와 신화, 고정된 관념이나 권력과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그로부터 자유로운 미술을 꿈꾼다. 동시에 그 미술행위는 한 개인의 독자적인 감수성과 세계관, 진정한 자아의 표출에 근접한다. 오늘날 현대미술은 그런 맥락 아래 출현한다. 그리고 그것은 타자와의 마주침을 전제로 한다.

다른 이의 삶과 생각과 마주치면서 비로소 한 미술가의 다양한 실험과 작업이 펼쳐지는 것이다. 고정된, 절대적인 미술의 어법이란 없다. 미술이란 개념도 늘 변화의 과정 속에서 단련된다. 니체는 고정적 진리란 없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진리의 나타남이란 ‘관점 수립의 문제’이다. 새로운 진리를 바라보는 관점은 기존의 가치와 진리에 대한 비판에서 나오며 그 기존의 가치를 비판에 부치는 것이 바로 ‘힘의 의지’다. 존재자들이란 힘의 외관이기에 힘의 의지는 존재자들이 서로 부정하지 않고 차이를 지닌 상태로 나타나게 해주는 요소이다.

니체에 따르면 존재자들이 자기를 부정하지 않고, 다른 존재자를 부정하지도 않고, 다른 존재자와의 차이를 지닌 채 자신의 본성 가운데 머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니체를 이은 들뢰즈를 비롯한 탈근대철학자들이 제기한 중요한 문제의식 중 하나는 ‘나’에 집착하는 존재론을 깨는 것이 되었다. 관건은 ‘나’라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나’를 아우른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이고 ‘생성’이라는 것이다. (강신주)

외부와의 마주침이 없으면 사유와 생성과 변화는 없다. 변화의 계기는 낯선 기호인 다른 사람과의 마주침에서 온다. 우리는 단 한순간도 ‘나’를 벗어나 외부의 입장에 설 수가 없다. (이른바 재현의 한계)

그러나 역설적으로 ‘내’가 남이 될 수 없다는 한계로 인해 변화의 계기가 주어진다. ‘내’가 생각하는 세계가 다른 이들의 그것과는 다를 수 있다는 것. 이런 자기객관화의 능력을 지닌 이가 결국 성숙한 존재이다.

이것이 모자랄 때 독선이 생긴다. 카프카의 통찰에 따르면, 성숙한 이는 ‘나’와 세계의 투쟁에서 언제나 후자를 지지한다. 다양하고 풍부한 사람들의 세계에서 ‘나’라는 존재의 왜소함과 한계를 독자나 관객이 절실히 되돌아보게 만드는 것이 바로 걸작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걸작의 캐릭터들은 독자에게 낯선 기호이고 미지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이른바 그 기호들을 통해 타인의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읽어내는 한편 ‘기호를 기호로 느낄 수 있는 감각’ 또한 예민하게 가다듬는 훈련을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를 절실하게 알기 위해 ‘문밖’의 ‘낯선 기호’와 만나는 일이 돼야 한다. 그로 인해 비로소 새로운 사유, 새로운 인간, 새로운 삶이 가능할 것이다.

박영택 경기대학교 교수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