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역사는 늘 새롭게 써야 한다는 명제가 설득력을 지닌다. 기록 외에 고고학이나 미술사의 대상인 유물과 유적 및 조형예술 또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잘 알려진 김홍도나 신윤복의 풍속도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 사회 분위기를 어떤 기록보다도 실감 나게 전한다. 석농 김광국(金光國·1727~1797)은 지체는 높지 않으나 부를 축적한 대물림한 의관(醫官) 가문에서 태어났다.
서화골동에 대한 애정과 감식안을 바탕으로 명화를 모아 조선왕조 전기 안평대군에 이어 후기를 대표하는 대수장가이다. ‘석농화원(石農畵苑)’이었으나 ‘해동명화집(海東名畵集)’으로 이름이 바뀐 화첩엔 폭마다 별지에 쓴 제발이 첨부되어 있다. 나중에 수집한 ‘화원별집(畵苑別集)’은 고려 말 공민왕부터 18세기에 이르는 이름난 화가들의 명품에 중국 명·청 그림까지 포함한다.
그의 관심은 중국과 일본을 넘어 서양의 ‘에칭(銅版畵)’까지를 아우른다. 이들 모두는 화첩에 속한 소품들이나 그린 화가의 대표작이며 기준작으로 제시된다. 이두 화첩만으로도 우리 옛 그림의 흐름과 대세를 읽을 수 있다. 역시 수장가로 이름을 얻은 상고당 김광수(金光遂·1699~1770)의 집 와 룡암을 석농이 방문한 때는 1744년 한여름이었다.
둘은 향을 피우고 차를 마시고 서화를 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소나기가 세차게 퍼부었다. 이때 현재 심사정(沈師正·1707~1769)이 옷이 흠뻑 젖은 채들어왔다. 소나기가 곧 그치자 대저택의 정원은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연출하니 화가로 하여금 붓을 잡지 않을 수 없었으니 현재의 ‘와룡암에서의 조촐한 모임(臥龍庵小集)’이 바로 그 그림이다.
마당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 뒷모습을 보이는 갓 쓴 현재와 상고당, 두 손을 모아 공손한 자세로 앉은 정면의 끼끗한 젊은이는 석농, 시중드는 두 동자까지 화면에는 5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당시 석농은 18세, 상고당은 46세, 현재는 38세였다. 석농이 쓴 발문에 의해 270년 전 당시 양반 아닌 중인들이 향을 피우고 차를 즐긴 구체적인 상황이 확인된다.
1853년 음력 3월 3일은 서성(書聖)왕희지(王羲之·307~365)가 회계 난정(蘭亭)에서 모임 1천500년이 되는 뜻 깊은 날이다. 이를 기념하고자 조선에서 김석준(金奭準·1831~1915)이 주축이 되어 잡과인 역과 · 율과 · 음양과 출신 등 여항문인 30명이 남산아래인 현 한남동이나 옥수동 부근에 모였다. 1830년 전후에 태어난 이들로 20대가 주류이나 60대 변종운(卞鍾運·1790~1866), 40대 후반 장지완(張之玩·1806~1858) 등도 참가했다.
중앙에 놓인 탁자를 중심으로 모인 인물은 옥색 도포에 긴 담뱃대나 합죽선을 들고 있으며 자세가 다양하나 의관을 갖추고 있어 사대부에 뒤지지 않은 의연함을 보여준다.
참가한 이들 30인 모두 예외 없이 지은 시들도 그림 다음에 이어 붙여 총 8m에 이르는 기념비적인 걸작이 다름아닌 ‘수계도권’이다.
이 그림은 현재 경기도박물관에서 개최 중인 ‘차, 즐거움을 마시다’ 말미에 출품돼 특별전의 대미를 장식할 예정이다. 부를 축적한 중인들은 서화의 애호가이자 수요자로 화단의 후원자 역할을 했다. 추사의 영향 아래 사회 일각에서 역할이 두드러지는 이들 중인에 의해 미래는 새롭게 준비되고 있었다. 그들 모임에 등장한 차는 과시적인 면도 없지 않으나 동시대 차 마시는 습속의 성행을 드러낸다.
차는 이들 중인의 자긍심 고취와 함께 단순한 기호품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원복 경기도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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