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중국역사로 본 청렴과 탐욕의 두 얼굴

‘수재라고 뽑혀 온 자들은 책을 알지 못하고, 효성스럽고 청렴하다고 뽑혀 온 자들은 아비와 따로 사네. 모든 것이 진흙탕에 뒤엉켜 흐려졌고 고관과 좋은 장수들은 닭처럼 겁을 먹는구나.’ 중국 양한시대에 장안에 떠돌던 노랫말이다.

우리는 늘 전통적인 도덕관념 중에서 예의와 염치를 입신처세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중요한 잣대로 삼는다. 예의란 사람을 다스리는 큰 법이고, 염치란 사람을 세우는 큰 마디라 할 수 있는데 관리나 사대부로서 청렴한 사람은 틀림없이 염치가 있고 인격이 고상하지만, 탐욕스러운 자는 무치하고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럼 중국 역사상 천하제일의 청백리는 과연 누구였을까? 물론 역대 ‘천하제일 청백리’에 대한 평가와 선정 작업이 별도로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천하제일 청백리라는 말은 청나라 초기 강희제가 1681년 직예순무 우성룡을 만난 자리에서 한 것이다. 우성룡이 평생 청렴하게 지내며 많은 공적을 남겼기에 강희제는 그를 칭찬하며 이런 명예로운 호칭을 주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익숙한 또 한 사람, 역대 왕조 중 북송시대에 이름난 청백리였던 포청천, ‘철면무사’라는 별명으로 불렸지만, 마음이 따뜻했으며 공평무사하게 법을 집행하며 정직하게 살았던 위인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청백리이자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준 정의의 화신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그가 평생 남긴 발자취는 각종 역사 기록에 남아 있어 고찰할 수 있다.

포공이 권력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준 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 한다. 또한, 포청천이 정의의 화신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어진 군주 인종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역사상 최고의 탐관오리는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이 나올 수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정확한 통계를 근거로 나온 것이 없기에 언급을 자제하는 것이 옳다.

2천년이 넘는 전제왕조시대의 중국역사는 늘 평화와 혼란이 반복되는 ‘일치일란’의 연속이었다. 청백리는 대개 치세 혹은 적어도 천하가 어느 정도 안정된 시기에 나타나곤 했다. 역사를 탐구하는 목적은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를 알고 과거를 현재에 유용하게 활용하는 데 있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고대에 흔히 시행되었던 대사면 조치의 대상에 탐관오리는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당 태종과 송 태조는 관리들의 비리와 부정부패에 대단히 민감해서 조금도 용서치 않고 엄하게 다스렸다. 역대 제왕들이 이처럼 탐관오리들을 사면하지 않은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는데 생각이 깨어 있는 황제라면 탐관이 황제의 발을 갉아먹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는 탐관오리를 막기 위한 좋은 방법을 적지 않게 제시하고 있는데 과거제도의 3공 즉 공평과 공정 그리고 공개 원칙을 지키려고 애썼다.

또한, 악비는 문관은 돈을 받지 않고 무관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으며, 송나라 때 관리들이 다른 곳으로 전근가거나 승진할 때마다 일정 등급에 있는 관리를 보증인으로 삼았던 제도, 그리고 비리를 저지르면 죽을 때까지 차별을 당하고 퇴직한 후에 받는 각종 특례에서조차 낮은 대우를 받았다.

이처럼 청렴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강조되는 관리로서의 본분임에 틀림이 없다. 중국역사에서 보듯이 청렴한 자는 후세에 본보기가 되고 부패한 자는 크나큰 대가를 치른다는 사실을 모든 공무원은 자각해야 할 것이다.

홍진영 오산소방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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