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장단과 강희안, 조선 초 최고의 문인화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37년 2개월의 공직을 마치자 곧이어 5월23일자로 10대 경기도박물관에 몸담게 되었다. 후반생을 새롭게 펼치게 된 경기도와의 인연을 잠시 헤아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2001년 77세로 유명을 달리한 어머니와 아까운 나이에 타계한 진정한 미술사학도인 외우 오주석(1956~2005)이 수원 출신인 점이 먼저 떠올랐다. 그밖에도 내 전공인 미술사와 관련한 크고 작은 일들이 머릿속에서 어른거렸다. 지면이 주어지자 내 자신과 경기도 지역의 역사상 빛난 선인들과의 인연을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에 따라 안산과 강세황에 이어 두 번째로 조선 초 최고의 문인화가인 강희안(1417~1464)을 소개하려 한다.

강희안은 조선 초 최고의 문인화가로 화원 안견과 더불어 예단의 쌍벽(雙璧)으로 그 시대를 화사하게 빛낸 서화가였다. 문화의 번영기인 세종대에 활동한 그는 서예에 능해 글자로 활자가 주조되었고 꽃 가꾸기를 즐겨 조선 초 최초의 원예서적인 『양화소록』을 저술했다. 비록 대작은 전해지지 않고 소품들이 주류이나 전칭작인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명상에 잠긴 선비)> 가 잘 알려져 있다. 18세기 대수장가인 김광국(1727~1797)의 수집품으로 현재 간송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 나뉘어 간직된 격조와 기량이 돋보이는 <청산모우> 나 <교두연수> 같은 산수화가 전한다.

도화서 소속 화원으로 작업화가인 안견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듯 보이나 회화사적 업적은 결코 그에 뒤지지 않으며 동가로 자리매김된다. 흔히들 조선시대에는 그림을 홀대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실상은 이와 다르니 중국에서도 서화의 공은 6경(經)에 비유되었다.

세종·숙종·영조·정조 등 성군은 모두 서화에 능했고 그림을 즐긴 문인화가들이 적지 않았다. 다만 성리학이 주체이념인 전통사회에선 기술직을 얕게 보아 외국어에 능통한 역관, 문서의 기록을 담당한 글씨에 능한 사자관, 병을 잘 고치는 의관을 비롯해 화원 등은 이들의 신분이 양반 아닌 중인들로 말단관직이었다. 그러나 이는 신분에 따른 폄훼일 뿐이지 그림 자체를 천시한 것이 아님을 간과해선 안 된다.

서울에서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사이에 낀 1987년 봄에 있던 일이다.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는 그 해 5월22일부터 25일까지 4일에 걸쳐 장단군 장단면 금곡동 소재 야산에서 강희안과 그의 부인 김씨 묘소를 발굴했다.

나 또한 발굴 팀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임진강 다리 건너 민통선 내 위치한 이 묘역은 일반인의 접근이 차단되었다. 강희안은 아들 없이 네 딸을 두었으니 외손봉사로 사위가 제사를 모셨다. 둘째 사위인 송윤종 집안의 묘역에 강희안 부부가 함께 묻혔다. 송씨문중에서 1978년에 4월 한식 때 성묘 차 들렸을 때 묘비의 명문에 의해 강희안 부부와 송종윤의 묘를 찾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강씨문중에선 강희안의 묘를 시흥군 수암면에 있는 강희안의 동생 강희맹(1424~1483)의 묘역으로 옮기려 했다. 이런 와중에 강희안의 묘에 손을 대 도굴을 시도한 흔적이 보이자 황급히 국립박물관에 발굴을 의뢰한 것이다. 군부대의 도움으로 지뢰탐지를 거쳐 이장(移葬)을 전제로 했기에 단 4일 만에 발굴을 마무리했다. 묘비에 의해 강희안은 1464년에, 부인은 이보다 20년 뒤인 1484년 안장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개결한 선비의 모습을 말해주듯 부장품은 매우 소략했으니 수저 한 벌과 갓 장식으로 쓰인 유리와 호박으로 된 구슬 13점이 전부였고 관에 사용된 쇠못뿐이었다.

그러나 묘비(墓碑)를 통해 조선왕조실록과 족보에서 차이를 보인 강희안의 생몰년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이곳 경기도 땅에서 회화사를 전공자가 조선 초 최고의 문인화가인 강희안 묘소 발굴에 참여한 것은 뿌듯함으로 다가오며 26년이 지난 일이나 바로 조금 전 일같이 생생하다.

이원복 경기도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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