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토리노의 말

고전이 수 천 년이 흘러도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는 시대를 막론하고 변하지 않는 보편적인 철학과 진리의 불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카테고리에서 벗어나 삶의 본질에 대해 객관적이고도 시공을 초월해 자유롭게 사유하게 만드는 힘. 그것이 고전이 가진 힘이다.

이 영화, 벨라 타르 감독의 ‘토리노의 말’은 최근에 개봉한 영화지만 고전과 같은 사유의 깊이가 있다. ‘토리노의 말’은 다른 영화와는 사뭇 다른 영화적 문체와 방식으로 펼쳐진다. 바람이 무섭게 불어대는 황량한 벌판의 외딴 농가에서 부녀가 생의 종말을 앞두고 보낸 6일을 담아낸 영화다.

그들은 단촐한 살림도구만이 있는 투박하고 거친 집안에서 하루에 한 번 찐 감자를 먹고, 딸이 팔 한쪽을 못쓰는 아버지의 옷을 입히고, 마당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고 말을 돌보는 것이 일상의 전부다.

이 반복적인 행위를 하는 가운데에도 6일동안 하루가 지날 때마다 아주 약간의 변화가 있는데 그것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것들이 하나씩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생계 수단인 말이 더 이상 밖으로 나가려고도, 먹으려고 하지도 않고, 우물물이 마르고 등잔에 불이 켜지지 않는다. 모든 것이 사라진 6일째 되는 날 부녀는 생감자를 식탁 앞에 두고 더 이상 먹지 못하고 앉아있는 장면에서 영화는 끝이 난다. 흑백화면이라 영화속 장면들이 선명해지면서 그들의 감정과 고뇌와 생을 살아내는 처절함까지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낮고 음울하게 깔린 배경음악은 비극적인 삶을 보여주듯 시종 불안하고 음울하다. 부녀는 최소한의 생존에 필요한 대화 이외에는 나누지 않는다. 이들에게 삶은 육체적 즐거움과 정신적 풍요로움과 사교의 장으로서의 기능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라도 하듯 그저 하루하루 치러야만 하는 생존 행위만 있을 뿐이다.

마치 그것은 하나의 의식을 치르듯 질서정연하고 경건하기까지 하다. 죽음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음에도 신에게 기도하듯 오늘을 어제처럼 이어간다. 삶이 계속되기라도 하듯 바느질도 하고 식사도 한다.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 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 사람들처럼 오늘을 열심히 감내하며 살아간다.

‘토리노의 말’은 롱테이크 기법으로 부녀의 단순한 행위들을 오랫동안 찍는다. 인내심을 가지고 봐야 할 영화일수도 있다. 그러나 상황에 대한 이유나 설명없이 종말이 다가오고, 단순하게 반복되는 그들의 일상을 보면서 그 의미를 유추해 보기도 하고, 질문을 끊임없이 하게 된다. 마치 명화나 고전을 대할 때 상상력을 동원하며 드넓은 사유의 바다에서 유영하는 것처럼 말이다. 즉 영화가 채워놓지 않은 커다란 여백을 관객 스스로 채워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 영화야말로 영화를 어떤 방식으로 보느냐에 따라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영화를 그저 수동적으로 소비할 것인지 혹은 적극적으로 관객 스스로 의미를 생산하고 부여할지 여부에 따라 영화가 함의하고 있는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부녀가 감자를 먹는 장면은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이라는 그림을 떠오르게 한다. 고흐의 그림 속에는 희미한 등불아래서 농부 가족이 식탁 앞에 앉아 감자와 차 한 잔을 먹고 있는 모습이 담겨있다. 가난하지만 가족이 함께하는 식사시간에 감사하고 행복해 보이는 따뜻한 그림이다.

고흐의 그림 속처럼 영화 속 부녀는 비록 감자 한 알로 하루를 살고 있지만, 그리고 생이 다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숭고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많은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삶에 대한 경건함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다. 때론 부족할 때 삶에 대한 애정과 열망은 강렬해지고, 삶이 단순할수록 본질은 더욱 명징하게 보여지는게 아닐까?

이국진 의정부문화원 이사ㆍ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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