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가을이 오면

언제부터인지 젊은 세대들 사이에 ‘로망’이라는 단어가 즐겨 사용되기 시작했다. 간절한 꿈이나 소망을 뜻하는 말로, 아마도 프랑스어의 로망(roman)이라는 단어가 그 근원일텐데 어떻게 우리 말에 들어와 통용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프랑스어의 로망 또는 로망스(romance)란 매우 비현실적인 무용담이나 연애담을 형식이나 규칙에 구애받지 않는 중세 시대의 문학 장르를 지칭한다. 로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진 것은 유럽 식자들의 공용어(lingua franca)인 라틴어가 아니라 지역 언어들, 즉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 프랑스어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로망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로맨스’, ‘로망스’, ‘로맨틱’ 등과 관련된 단어인데, 사실 많은 사람들이 예부터 사용한 한자어라고 생각하는 ‘낭만(浪漫)’이란 단어도 로망이란 음을 가차(假借)한 것일 뿐이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유행한 철학·예술사조인 낭만주의(romanticism)가 그렇게 불리게 된 것은 로망이라는 중세 문학장르에 나타나는 비현실성, 공상, 환상 등의 특징이 이 사조와 어울린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낭만주의 사조는 이성과 합리성을 숭상한 18세기의 계몽주의와 연관이 있다. 극단의 이성과 합리성을 추구하다 한계를 직시하고 비현실과 비이성, 환상 등으로 빠져나가게 된 것이다.

초기에 낭만주의 사조를 이끌었던 이들은 다름 아닌 독일 합리주의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칸트(Immanuel Kant)였다. 그는 사물의 본질 즉 물자체(Das Ding an sich)를 인간의 오감과 이성으로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이성의 한계를 직시했으며, 우리가 어떤 예술작품에 몰입해 무아지경에 이를 때 물자체를 가장 근접해 경험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칸트의 생각이 초기 낭만주의자들의 사상적 기초가 됐다.

바야흐로 가을이 깊어가는데 우리의 일상은 바쁘기만 하다. 잡다한 생각을 버리고 가을 석양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어들기를 언제부터 하지 않게 됐을까? 우리는 매일 일터에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효율 지상적인 두뇌활동을 강요 받고 살아왔다. 어린 시절 가졌던 꿈과 환상 따위는 잊은지 오래다. 잠깐이라도 일상을 떠나 낭만주의자가 돼보는 것은 어떨까 하고 작곡가 한 사람을 소개하려 한다.

슈베르트와 슈만 등의 독일가곡이나 쇼팽, 리스트 등의 피아노 음악은 그야말로 낭만주의 음악의 아이콘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하다. 하지만 필자는 낭만주의적 자의식을 가장 뚜렷이 지녔던 작곡가가 누구보다도 프랑스의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였다고 생각한다.

그의 환상교향곡(Symphonie fantastique)은 예술가 스스로의 자서전적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으며 낭만주의를 작곡가의 온몸으로 분출해낸 걸작이다. 곡 전체에 걸쳐 아름다움과 그로테스크함이 거짓말처럼 병치되어 있지만 그것들이 어우러져 놀라운 유기체를 만들어낸다.

오케스트라를 위한 트리스티아(Tristia, Op. 18)라는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장면들을 묘사하고 있는데 마지막 악장인 ‘햄릿의 종막을 위한 장송행진곡’에는 대규모 오케스트라의 포효와 어우러지는 무언의 합창이 압권이다. 둘째 악장인 ‘오펠리아의 죽음(La mort d’Ophlie)’에서 베를리오즈는 냇물에 떠내려가는 오펠리아의 차가운 주검과 그 비극적 아우라를 소리의 팔레트를 사용하여 회화적으로 묘사했다. 가을이 가기 전 꼭 들어보시라.

베를리오즈의 작품들을 가을에 어울릴 음악으로 소개하고 보니 문득 이런 생각도 든다. 이문세의 ‘가을이 오면’이나 김광석의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도 올 가을에 듣기에 괜찮겠구나 하는….

양승렬 수원오페라단 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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