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가을날의 인문학 공부

지독히도 힘들었던 지난 여름이 문득 떠나간다. 아직 대낮의 태양은 여전히 따가워 그 여름의 진한 열기를 상기시켜주지만 이 뜨거움은 분명 이전만 못하다.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과 서늘한 기운이 은총처럼 다가온다. 이렇게 또 한 계절이 사리지고 새로운 계절이 변함없이 찾아온다.

이른 추석을 보내고 이제 다들 책상에 앉아 이내 짧아진 햇살을 아쉬워하며 책을 읽거나 빛바랜 문장을 더듬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어두운 시절일수록, 답답하고 가물거리는 시대일수록 책 읽는 이들의 뒷모습은 여전히 감동적이다. 책은 배신하지 않고 쌓인 공부는 넘치는 법이 없다. 우리가 책을 읽고 공부하는 이유는 자신의 사는 시대와 현실, 내 삶을 제대로 들여다보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반성의 시간이자 자리이다.

공부는 인간의 삶과 문화 전반을 다시 보고 이해하며 그것의 경과와 사정을 온전히 통찰하여 앞으로 이어질 생의 자리를 찾아가는 일이다. 그러니 반성이란 단지 지난 시간의 것을 추억하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다시 살아갈 자리를 준비하는 일이다. 우리가 사는 현실이 어떤 것인지를 정확히 직시하고 이해하며 그로 인해 빚어진 모순이나 어긋난 자리를 예리하게 들여다보아 잘 맞추려는 시도이다.

공부란 우선적으로 이러한 안목과 통찰, 사유의 깊이를 지닌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한 시각점과 반성과 성찰의 마음을 지니게 하는 것이 공부다. 인문학이란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근자에 여기저기서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고 다양한 인문학 강좌가 열리고 있다. 월터 카우프만은 인문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문학은 현재의 지배적 관점에서 벗어나 비판적이면서도 다른 대안에 입각해 비전을 마련하려는 학문이다.”

나 또한 인문학강좌의 일환으로 현대미술과 관련된 여러 강의를 하고 다닌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러한 강의가 상투화된 상식이나 얄팍한 교양을 전도하는 역할에 머물까 두려워한다.

최근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나는 인문학 강좌란 게 대부분 그런 혐의에서 자유로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새삼 생각해보지만 인문학은, 학문의 중요한 가치와 의미는 삶의 가치에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일이다. 이를 통해 비판적인 정신과 깨어 있는 눈을 지닌 ‘정치적 시민’을 양성하고 독려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러한 인문학의 과제는 지워져버리거나 망실된 채 시장에 편입돼 얄팍한 지식, 말랑말랑한 교양 수준으로 전락하고 있다. 그것은 지식조차 상업주의나 소비주의에 이용당하는 꼴이다. 지식조차 상품처럼 소비되고 유통되고 트랜드가 되어 소모되고 있다. 인문학은 이른바 정치적 시민을 어떻게 양성해내느냐의 본질적 과제임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인문학은 보편적으로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의 삶과 문화, 역사를 배우고 이를 통해 진정한 인간다움과 그 인간다움이 가능한 현실을 만드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적인 가치가 지금 이곳에서는 망실돼가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다시 이 가을에 책을 읽는 진정한 이유에 대해, 공부해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요즈음 유행이 되다시피 한 인문학이 무엇인가도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독서는 사물과 세계를 보는 새로운 눈과 마음을 생성시켜주며 이전의 나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간형으로 환생시키는 기이한 체험을 안긴다. 오로지 독서만이 그런 마술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박영택 경기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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