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필자의 출신고교 개교 40주년 음악회를 위한 합창음악 작곡을 부탁받은 일이 있다. 어려운 일이다. 비전문 합창단이 소화할 수 있을 정도의 난이도를 지니면서도 예술적 호소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랜동안 교회 성가대를 지휘해 왔기 때문인지 가장 먼저 개신교회 성가 음악 같은 난해하지 않지만 진지함이 베어있는 멜로디가 떠올랐다. 이것만 가지고는 부족한 감이 느껴졌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해야 하니 뭔가 씩씩한 구석도 있어야 하고 시종일관 종교적일 수도 없으니 보편적 공감을 이끌 수 있는 ‘한 방’이 필요했다.
일단 합창단의 노래가 시작되기 전 전주는 모교의 교가에서 땄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씩씩한 구석은 대학시절부터 무척 좋아하던 베토벤의 발트슈타인 소나타 첫 머리 부분을 선택했다. 자 이제는 ‘한 방’, 이것을 어찌할 것인가? 필자의 머리를 오랫동안 맴도는 것은 다름아닌 노래방에서 노래한 뒤 점수와 함께 울리는 빵빠레 “빰빠라밤빠 빰빠라바~ ”였다. 조금 코믹할 수도 있지만 한국인에게 익숙하지 않은가? 화음을 조금 클래시컬하게 변형시키고 화성변화의 속도를 늦추니 위엄도 있고 비장함도 느껴지는 괜찮은 ‘한 방’의 재료가 됐다.
완성하고 보니 피식하고 웃음이 나온다. 친구들과 어울려 노래방에서 노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면 노래방 기계의 빵빠레가 머리속에 새겨져 있을까 하는 약간은 씁쓸한 반성을 하게 된다.
필자같이 그리 신통치 않은 음악가는 물론이거니와 대가 작곡가들도 그들의 음악에 자신의 인생관과 정체성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베토벤의 소위 ‘운명교향곡(교향곡 제 5번 c 단조, 작품 67, 1808년 초연)’을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베토벤을 따르던 안톤 쉰들러라는 이가 곡의 첫 머리 ‘빰빰빰 빠’ 모티브를 작곡가 자신이 “운명이 이와 같이 문을 두드린다”라고 말했다고 전해 생겨난 이름이다. 귀머거리가 되어가는 자신의 운명을 극복하고 결국 예술로 이겨낸다는 자서전적 이야기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지만 사실은 베토벤 자신의 정치적 메세지가 담겨진 것일 가능성이 더 많다.
음악학자들이 주목한 것은 베토벤과 동시대에 파리에서 활동하던 케루비니(Luigi Cherubini)의 프랑스대혁명기인 1894년에 발표된 ‘판테옹에 부치는 찬가(L‘hymne du Pantheon)’다. 이 곡은 관악합주와 합창을 위한 작품으로 프랑스의 혁명정부가 장려하던 프로파간다 음악이다. 가사의 내용은 혁명을 위해 싸우다 죽은 영웅의 무덤앞에서 동지들이 모여 “칼을 들고 맹세하리, 우리도 공화국을 위해 기꺼이 죽겠노라”라는 섬뜩한 정치선동이다. 놀라운 것은 교향곡의 그 유명한 도입부 스물 한 마디 정도가 케루비니의 작품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다. 케루비니를 당대 최고의 작곡가라고 칭송하던 베토벤이 이 작품을 몰랐을 리 없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왜 비엔나에서 살던 베토벤이 파리의 케루비니의 이 작품을 인용했는가 하는 것이다.
베토벤은 계몽주의에 심취했으며 공화주의자였다. 합스부르크 왕가에 의한 제정사회였던 비엔나가 웬지 그에게는 심기가 불편한 곳이었을 것이다. 프랑스대혁명을 동경하고 자유 평등 형제애의 가치를 신봉하던 베토벤은 숨막히는 신분질서를 고수하던 비엔나에 돌을 던지고 싶었을 것이다. 파리에서 활동하던 케루비니의 작품을 알 리 없는 비엔나의 귀족들은 베토벤의 교향곡을 들으면서 이 음악이 자신들에 대한 경고와 조소의 메세지였음을 전혀 몰랐을 것이다. 검열을 피해가면서도 자신의 신념어린 메세지로 ‘한 방’을 날린 그의 명석함과 대담함에 경의를 표한다. 우리는 이제 이 작품을 더이상 ‘운명교향곡’이라고 부르지 말자.
/양승렬 수원오페라단 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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