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孝誠으로 본 弔花 속의 謹弔

공자의 학이(學而)편에 나오는 ‘子曰 父在 觀其志 父沒 觀其行 三年 無改於父之道 可謂孝矣(자왈 부재 관기지 부몰 관기행 삼년 무개어자부도 가위효의)’로 눈을 밝혀 효심으로 弔花속의 謹弔란 글자를 본다. 글자의 뜻이 그려지는 순간 ‘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자왈 불환인지불기지 환부지인야)’라는 문장의 뜻이 몸가짐과 마음에 회초리를 댄다.

지금까지 건성으로 보아왔던 커다란 글자 ‘謹弔’가 오늘은 ‘孝’로 다가와 사람의 도리를 깨우친다.

왜 ‘謹弔’라는 단어를 쓰며, 무슨 의미로 근조란 상장을 상주가 가슴에 다는지 많은 사람에게 물어보았지만 명쾌한 답변을 해주는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지금까지 관례적으로 남들이 사용하니 그 뜻이나 의미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 없이 그저 전해오는 전통문화려니 생각하고 으레 따라 한다는 것이다.

한자는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다. 상형, 지사, 회의, 전주, 형성, 가차, 우리나라 국자, 일본자 등이 있다. 본 글자는 이미 만들어진 두 글자를 합쳐서 새로운 뜻을 표현하는 형성문자다.

‘謹’ 자는 ‘말씀 言’ 자와 ‘노란 진흙 근(菫)’ 자가 합쳐서 ‘삼갈 근’의 뜻을 가지며 ‘말은 고운 황토처럼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로 해석된다. ‘삼가다, 자성하다, 금하다, 엄금하다,’ 등으로 직역할 수 있으며 ‘진흙 위를 걸어갈 때처럼 말을 조심하고 될 수 있는 한 삼가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弔’ 자는 ‘활 궁 弓’ 자와 ‘뚫을 곤(ㅣ)’ 자가 합쳐서 ‘조상할 조’의 뜻을 가지며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전사한 전우를 향해 활을 땅에 세워놓고 애통하고 슬퍼했던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로 ‘조상하다, 불쌍히 여기다, 위문하다, 매달다. 조문하다.’ 등으로 해석되어 조문하면서 보내는 弔花에 ‘謹弔’라고 쓰는 것이다. (‘吊’자는 ‘弔’자의 속자다)

‘謹弔’라는 글자는 80세를 지나 호상(好喪)을 맞는 21세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상주(喪主)가 ‘謹弔’라고 쓰인 것을 가슴에 달고 조문객을 맞는 것은 조문객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槿弔’의 뜻과는 현실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종교적으로 예를 들면 ‘고인께서는 신앙생활로 구원을 받아 영원한 천국으로 聖化하셨다.’고 믿으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들과 지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다. 생전 굳게 믿던 신앙을 어찌 자식이 부인할 수 있겠는가? 생각만 해도 끔찍한 불효다. 마지막으로 부모님께 올리는 예에 불효가 없도록 ‘謹弔’의 뜻을 정확하게 알렸으면 한다.

지금부터라도 ‘槿弔(吊)’라는 글자 대신 효성이 살아 있는 단어, ‘聖化’를 사용했으면 한다.

항시 효는 예를 중시하므로 爲政편에 나오는 ‘孟懿子 問孝 子曰 無違 樊遲御 子告之曰 孟孫 問孝於我 我對曰 無違 樊遲曰 何謂也 子曰 生事之禮 死葬之以禮 祭之以禮’(맹의자 문효 자왈 무위 번지어 자고지왈 맹손 문효어아 아대왈 무위 번지왈 하위야 자왈 생사지이례 사장지이례 제지이례)의 가르침으로 ‘聖化’로 마지막 효를 표현했으면 좋겠다.

이 기회를 통하여 민족의 정신인 HYO(Harmony of Young & Old)를 생동시켜 효자로 전국방방곡곡 가정을 튼튼하고 건강하게 만들고 나아가 세계 몽골리안들이 하나로 소통하는 통로가 되어 21세기 문화의 실크로드가 되기를 기대한다.

조성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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