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 가면 ‘~주의’, ‘주장’을 외쳐대는 책들로 넘쳐난다. 이 책을 읽으면 이래야 될 것 같고 저 책을 읽으면 저렇게 살아야 될 것 같다.
가치관이 서로 상충되는 책들도 부지기수다.
예를 들면 한쪽에서는 성공하라고, 최고가 되라고 부추기고 한쪽에서는 느리게, 비우며 살라고 촉구한다.
아마 이 세상의 모든 정보들을 섞으면 최고의 정보가 아니라 ‘혼란’과 ‘진실의 실종’이 아닐는지.
실제로 미국에서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언젠가 미국정부는 대단히 중요한 외교정책을 내리기위해 각 분야의 최고권위자를 한 자리에 모아서 도출한 결론으로 정책을 펼쳤다. 최고 권위자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결정판이니 얼마나 완벽한 프로젝트가 나왔겠는가?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정책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최상의 이론이 최상의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한 사례다.
빨강, 파랑, 노랑색을 섞으면 무척 아름다운 색이 나올 것 같지만 검정색이라는 무채색이 나오는 것과 같은 양상이다.
고전철학에서부터 계발서까지 나름 독서를 꽤 하는 필자는 최근 수많은 지식과 가치관의 충돌로 피로감에 빠져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내가 알고 있는 게 뭐지?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라는 자각이 들면서 어떤 것도 ‘판단하지 말자’라는 생각이 내면에서 들렸다. 어떤 깨달음 같은 것이었다.
살아오면서 내가 믿고 따랐던 진실이나 가치는 일정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깨달음이나 가치기준으로 대체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어제의 진실이 오늘은 더 이상 아닌 경우는 또 얼마나 많았던가?
과학의 발전은 당시까지 진리로 인정되었던 학설이 후대의 과학자에 의해서 오류가 발견되고 기존 학설을 반박하는 가설을 세우고 증명되면서 새로운 학설이 탄생되고 이것이 반복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사회과학도 마찬가지다.
한 시대, 혹은 조명을 받았던 역사적 인물은 후세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가치관에 따라 달리 해석되고 평가된다.
진리나 진실이라는 것은 가변적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자연주의 철학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안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많이 안다고 말하지만/ 보라! 그것들은 날개가 돋쳐 날아가 버렸다./모든 예술과 과학이,/그리고 무수한 발명품들이./바람이 부는구나./우리가 아는 것은 단지 그것뿐./”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매사를 계산하고 분석하고 비판하고 재단하고 내린 결정이 과연 최선의 선택인지, 오히려 너무 많이 알아서 자기 덫에 걸리는 경우는 없는지도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그저 텅 빈 마음으로 세상을 처음 만난 것과 같은 투명한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사물 그대로가 내 안에 투영되면서 본질에 닿을 것이다.
그 본질조차도 판단하지 말고 바라만 본다면 영혼은 상처받지 않을 것이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소로우의 말처럼 그저 바람이 부는 것을 아는 것, 우리가 아는 것은 단지 그 정도 아닐까?
이 국 진 의정부문화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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