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전세살이 서럽다구? 집사는 사람이 갑이다

박정임 경제부장 bakha@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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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 소원은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는 거였다. 당시 내가 사는 마을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성질 급한 아버진 여닫이문이 있고 다리가 달린 텔레비전을 일찌감치 사다 놓으셨지만,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무용지물이었다.

그때만 해도 농사일이 없는 겨울이면 어른들은 마실 집을 정해 놓고선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화투를 쳤다. 점당 10원인 민화투라 몇 날 며칠이 지나도 천 원짜리 지폐 한 장 손에 쥐기가 어려운데도 딱히 할 게 없는 시골마을에선 겨울이면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길고 긴 겨울밤에 변화가 온 건 인근 마을까지 전기가 들어오면서부터다. 낮엔 화투로 소일하던 부모님이 어느 날부턴가 동네 밖으로 마실을 가기 시작했다. 어머닌 지금도 70년대를 추억하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여로’라는 드라마에 푹 빠져 얼굴 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한날 어머니를 졸라 텔레비전 구경을 갔는데 이상하게도 주인아주머니 얼굴엔 귀찮은 내색은커녕 자랑스러운 미소가 감돌았다. 방안엔 이미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빼곡히 들어앉아 있었다. 어렵게 자리를 잡고는 텔레비전이 켜지기만을 기다리던 내 눈에 놀랄만한 광경이 들어왔다. 맨 앞자리, 말 그대로 명당자리에 보란 듯이 드러누워 있는 주인집 아들이었다. 그날, 저린 다리 탓에 코에 연방 침을 바르는 동안 내 소원은 다리 쭉 뻗고 누워서 텔레비전 보는 게 됐다.

고등학교 다닐 땐 따뜻한 물을 맘대로 쓰는 거였다. 일찌감치 공부한답시고 도시로 전학해 전세살이를 했는데 주인집 연탄아궁이에 올려진 솥에서 물 한 바가지 얻을 때마다 눈치를 봤던 것 같다. 늦은 밤 주인집 아주머니의 학생 안 자냐는 물음은 전기요금 많이 나오니 그만 자라는 일종의 압력이었다.

설움 하면 집 없는 설움만 한 게 또 있을까. 그때 나처럼 셋방살이 하는 친구들은 대문 한번 시원스럽게 닫아보는 게 소원이라고도 했다. 학교 도서실서 공부하다 늦게 들어갔는데 주인이 문을 걸어놓은 채 잠들어 대문 두드리다 개에 물린 친구는 제발 문이라도 제때 열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땐 빠듯한 살림에 문간방을 세 놓는 가정이 많았다. 마당과 대문을 같이 쓰는 건 불편도 아니었다. 아예 거실이며 부엌을 함께 사용하는 일이 허다했다. 주인집 등쌀에 물도 맘껏 쓸 수 없는데다 어린 아이를 둔 젊은 부부는 아이 울음소리만 나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애들이 많다는 이유로 전셋집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던 때 얘기다.

집값은 참으로 이상하다. 가격이 올라도 걱정, 떨어져도 걱정이다. 특히 집 없는 사람들에게 집값 상승은 악몽이나 다름없다. 내 집 마련의 꿈이 멀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동산 경기침체로 집값은 내려가고 전세금은 오르는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농협경제연구소에 따르면 국내 주택경기가 불황 국면에 진입해 집값이 앞으로 1~2년간 더 떨어진단다.

전세금을 올려 달랄 땐 고통이었지만 그러는 사이 집값과 전세금의 차이가 형편없이 줄어들었다. 조금만 보태도 집을 살 수 있게 된 거다. 여기에 더해 아파트 매수세가 실종되면서 집사는 사람이 큰소리치는 세상이 됐다. 집을 팔려는 사람은 많은데 사겠다는 사람은 적으니 집을 팔려면 온갖 사탕발림을 해야 한다.

임대주택 건설 확대 등 주택산업의 기초 여건을 개선하는 정책들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미분양 아파트들이 넘쳐나면서 분양가를 30%나 할인해 주는 아파트들도 널려 있다. 무리한 대출로 집 장만해 고민하는 ‘하우스 푸어’가 넘쳐나는 세상에 이쯤 되면 집 없는 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집값이 더 떨어진다고 하니 셋방살이 설움만 생각하지 말고 집사는 사람이 갑인 세상을 길게 누린다고 생각하자. 내 경우만 봐도 전세 살면서 집 보러 다니는 재미만큼 쏠쏠한 게 없었다.

 

박 정 임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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