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 교도관 생활을 끝내고 나니, 흰 머리칼, 주름살로 남은 초로의 내 모습이 거울 속에서 자꾸만 말을 건네 왔다. 내일로 미루어 두었던 하고 싶었던 일들을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해 볼 의향은 없느냐고. 삶의 패턴이 바뀌면 마음의 색깔 또한 달라진다했던가, 심중에 꼭꼭 묻어 두었던 얘기들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졌다.
성공이든 실패든 흔치 않는 직업인으로서의 내 삶의 경험은 소중하고, 이런 계기가 아니라면, 어쩌면 시간의 모래밭에 묻혀 잊혀지고 말 높은 담 안의 더러 슬프고 또 따뜻한 얘기들을 회현하여 적어보기로 한다.
일에서의 은퇴가 삶에서의 은퇴가 아닌 바에야 지난 내 삶에 대한 격려와 회초리를 함께 들고….
교도소 높은 담 안의 삶은 각박하고 고독하다. 온통 까발려져 세상에 노출되어 버린 오욕이야 시간이 지나면 묻혀가지만 고독을 즐길 준비를 소홀히 하면 홀로 떨어진 아픔에 처연함은 배가 된다.
주어진 삶의 틀에 마음을 맞추는 일
마음의 맷집이 좋은 사람들은 각박한 공간에서도 여유를 만들어 가지만 반대의 경우 부질없는 번민과 요동으로 내상만 깊어간다. 주어진 삶의 틀에 내 마음의 크기를 맞추어 몰입하고 즐겨감이 징역살이의 알파요 오메가다.
예나 지금이나 교정시설에서는 원예반을 만들어 꽃과 나무 등을 가꾸게 하고 있다. 시설의 자연친화적 환경을 배려하고 작업을 통해 재소자의 심성순화를 유도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이 작업장은 속칭 범털들이 선호하는 곳이고 또 그렇게 구성되어 진다.
사회일반인의 시각에서는 처우의 불공정을 시비할 수 있고 또 그런 측면을 부인할 수도 없겠으나 일반 재소자 및 흉악범들에도 잘 알려져 있는 유명인사들을 그들과 혼재하여 둘 경우 발발될 수 있는 교정사고를 사전예방 하자는 고육지책으로써의 측면이 더욱 강하다. 어쨌든, 시절에 따라 원예반 구성인력의 사회적 인지도가 다소 차이가 있겠으나 80년대 중·후반 모 교도소의 원예반 구성원의 면면은 참으로 화려했었다. 10여명의 재소자 모두가 전직 고위관료, 의원, 군인, 기업가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들 모두는 만만찮은 내공들이 있어 맡은 일에도 성실히 임했었다. 어느 작업장이나 재소자 그룹에서는 이들을 이끄는 반장을 선임하는데 마침 원예반에서 반장이 출소를 함에 따라 새롭게 반장을 선출하게 되었다. 그런데 후임반장의 선출문제가 난관에 봉착하여 담당 교도관이 당황해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이들 모두가 서로 반장을 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선 탓이었다.
험한 세상 사는 데 필요한 지혜
모 전직 고위관료는 감독주임 순시 시 예쁜 화분 하나를 들고 나와 “주임님 이게 제가 키운 꽃입니다”하고 읍소하기에 이를 만큼 후보자들의 경쟁의 열기가 뜨겁기 그지없었다. 사회일반의 시각에서 보자면 세상의 지위와 권력을 다 누린 작자들이 무슨 비루한 추태냐고 혀를 찰 수도 있겠으나 그게 바로 마음 편히 징역을 사는 방법이요, 내공임을 경험한 자는 다 알고 있다.
인간이란 너나없이 디디고 선 공간만큼의 마음으로 작아질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마음의 평수를 줄여 즐기지 않고는 정신적 궁핍에서 벗어 나기가 쉽지 않다. 고독에 몸부림치거나 외로움에 사무쳐 징징거리기 보다는 초등학교 시절 줄반장을 탐하던 마음처럼 사소한 욕구들을 키우고 역할놀이를 즐기는 것, 그것이 아픈 시간을 이겨내는 보약인 것이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처절한 반성과 참회로 징역살이를 스스로를 구원하는 시간으로 만들어 가기도 한다. 그러나 범인(凡人)들에게 있어서야 반성도 하루 이틀이지 무연묘처럼 세상에서 버려진 듯한 아픔을 잊고 뼈저린 시간과의 싸움에서 이겨내는 지혜가 더욱 다급할 터, 주어진 시간 내 마음을 작게 하고 토닥여 갈 일이다.
비록 징역살이가 아니라도 마음의 평수를 다듬는 일이란 험한 세상, 인생의 거친 물살을 타고 넘을 때도 어쩌면 필요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태희 前 법무부 교정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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