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우리는 잘 살고 있는가?

오래 전 한때 ‘잘 살아보세!’의 구호가 넘치던 시절이 있었다. 전국 방방곡곡,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잘 살아보자는 투지(?)를 불사르며, ‘하면 된다’ 식의 목표 지향적 삶이 잘 사는 것의 표상이었던 시절이다.

 

어느 누군가의 선창이 있었겠으나, 사실 그 만큼 압축적으로 우리 모두의 폐부를 파고드는 슬로건도 없었던 듯싶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이는 오늘 우리의 모습이 단군 이래 최대의 부를 누리고 있다고 호기롭게 외치기도 한다. 형편이 이러다 보니, 혹여 잘 사는 것에 대한 다른 가치를 얘기하려 든다면, 세상 물정에 어둡고 물색모르는 인사이거나 한가한 입방아나 즐기는 호사가로 치부되고 만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도 있듯이 지난 시절 ‘잘 살아보세!’를 외치던 이들은 ‘파이가 커야 나눌 몫도 크다’며, 고지가 바로 저기니 희망봉에 다다를 때까지 좀 더 허리띠를 졸라매자고 했다.

 

그런데 아직도 곳간의 쌓임이 충분치 못한 것인지, 아니면 곳간과 인심의 상관관계가 꼭 그러하지만은 않은 것인지, 곳간은 쌓여간다고 하는데 인심은 그렇지 못함이 사뭇 이상하다.

 

오늘 그들은 다시 ‘시장’과 ‘낙수효과’(落水效果, trickle down effect) 따위를 들먹이며, 그나마 언젠가 떨궈질 지 모를 물 한 모금을 기대하려면 부지런히 시장을 채워나가야 한다며 곳간과 인심의 사정이 달라졌음을 넌지시 알려준다. 그 속에서 우리는 ‘경쟁’과 ‘효율’이란 달콤한 속삭임이 되뇌어지고 있음을 어렴풋이 눈치채게 된다.

경제는 좋아졌지만 인심은 나빠져

 

잘 산 다는 게 뭔가? 배부르고 등 따뜻한 것을 그 중심에 놓는 것이야 너무나 당연지사고, 오히려 잘 산다는 것의 물적 가치가 더도 덜도 말고 딱 거기에 머물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한층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경쟁과 효율이 지배하는 삶에선 내 배를 불리기 위해 남의 배를 주려야 하고, 내 등을 덥히려 남의 등을 시려야 한다. 이는 ‘승자전취’(winner takes all)와 ‘최소투입-최대산출’의 무한 에너지를 전제로 하는 경쟁과 효율이란 물리학적 괴변이 맞닿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 결과다.

 

거기선 적당과 멈춤, 협동과 연대, 상호부조 등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할 뿐이며, 오직 뺏으려는 자와 뺏기지 않으려는 자, 승자와 패자만이 존재하고 무언가를 얻기 위해 무슨 짓도 마다않을 대담함이 강요된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이렇지 않은가 자문해 보며, 이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 한다면 우리 같은 범부들에겐 무섭고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무한경쟁사회, 어떻게 살 것인가?

 

지금, 여기 우리의 삶은 한 순간의 찰나라 할 것이나, 거기엔 어제의 흔적과 오늘의 몸짓, 내일의 상념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금, 여기의 삶의 모습이 어떠하고 어떠해야 하는지 답을 구할 수 있어야 한다. 비록 자기합리화와 자기로부터의 도피에 가려 종종 시계가 흐려지기도 하지만, 삶의 항해를 이어가기 위해선 피할 수 없는 질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것은 생물학적 삶의 시간을 넘어서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미 우리의 세상살이가 잘 살아 보자는 집단 욕망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 속의 삶이 된 마당에 이런 저런 토를 다는 일이 부질없는 짓일 수 있고, 하물며 이를 멈추려 함은 당랑거철(螳螂拒轍)의 무모함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어제보단 오늘, 오늘보단 내일의 삶이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마저 팽개칠 순 없다. 과연 우리는 잘 살고 있는가?

 

박명학 예술과마을 네트워크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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