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매니페스토 정책선거

며칠전 연극 한편을 보았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남녀평등을 실현하려는 노력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작금이지만, 아직도 특별한 날을 앞둔 연인간의 사이에서는 남성의 이벤트 준비를 기대하는 여성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필자의 여자친구도 예외는 아니어서 무려 기념일 한달전부터, 은연중 본인의 기대를 드러내며 철저히 준비하라는 압력을 행사하기 일쑤다.

 

얼마 전은 일년 중 가장 강도 높은 압력에 시달린 천고만난(千苦萬難)의 시기였는데, 그도 그럴것이 불과 십여일 사이에 기념일이 두개나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준비한 것이 연극관람이었는데, 기억에 남을 독특한 연극을 고른다는 것이 관객참여형 연극을 선택하게 되었다.

 

연극은 처음부터 색달랐다. 연극 시작에 앞서 개성이 서로 다른 남녀배우 각 3명이 차례대로 나와서 장기자랑을 선보이며 관객들에게 자신을 주인공으로 뽑아줄 것을 호소했다. 배우들의 간절한 호소가 끝나면 관객들의 즉석 투표로 공연의 남녀주인공이 결정됐다. 매회마다 배우들은 치열한 경쟁을 치러야 하지만 관객들은 마치 오디션 현장의 심사위원처럼 자기 취향대로 주인공을 고르면 되는 것이다. 주인공이 된 배우들은 예쁜 옷을 입고 연기를 하고, 선택받지 못한 배우들은 쫄쫄이 타이즈 복장으로 무대소품을 나르거나 직접 소품이 되는데 이런 모습들에 관객들은 폭소하게 된다. 연극의 묘미는 공연 도중 2차 투표를 통해 주인공을 교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잘생긴 외모 덕에 여자관객들의 다수표에 힘입어 남자주인공으로 선택되었던 꽃미남 배우는 외모만큼 뛰어난 웃음을 주지 못한 죄로 2차 투표에서 교체되어 쫄쫄이 타이즈를 입게 되었다.

 

1년 남짓의 짧은 선관위 근무경력에도 불구하고 벌써 직업병이 생겼는지, 연극을 관람하는 동안 현실정치를 빗대어 보게 되었다. 현재의 대의민주주의 체제하에서 국민은 선거를 통해 대표자를 선출하여 정책문제를 처리하도록 한다. 연극에서 주인공 선택 기준이 ‘누가 나를 즐겁게 해 줄 것인가’라면 선거에서 대표자 선출기준은 ‘누가 나를 위한 정치를 할 것인가’이다. 여기서 공통된 것은 ‘나’인데 이는 연극에서는 관객이고 선거에서는 국민인 유권자이다. 연극에서 관객은 배우들의 장기자랑을 보고 주인공을 선택했다면 선거에서 유권자는 후보자의 공약을 보고 대표자를 선택해야 한다. 후보자의 공약에는 누가 유권자 본인을 위한 정치를 할 것인가에 대한 정보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후보자는 국민이 원하는 실현가능한 공약을 제시하고 유권자는 제시된 공약이 지킬 수 있는 제대로 된 쟁책공약인지 꼼꼼히 따져보고 후보자 선택을 하는 것. 이것이 매니페스토 정책선거이다. 정책중심의 선거문화 정착은 유권자의 맹목적 투표가 아니라 합리적 판단에 근거한 회고적·전망적 투표를 유도함으로써 책임정치를 활성화하여 국가발전에 기여한다.

 

우리나라의 매니페스토는 2006년 지방선거에 도입된 이후 점차 뿌리를 내리고 있다.

 

매니페스토 정책선거가 성공적으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유권자의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프랑스의 정치학자 토크빌은 ‘모든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고 하였다. 상대 후보 비방에 몰두하거나 인기영합식 부실공약을 제시하는 후보자나 정당도 문제이지만, 공약을 꼼꼼히 살펴보고 그것에 근거해 투표하지 않는 일부 유권자들이 더욱 문제이다. 선거에 있어 최종 책임은 유권자에게 있으며 선거의 수혜자도 피해자도 결국 유권자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번 제19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우리 모두 정당·후보자의 공약을 꼼꼼히 따져보고 투표하도록 하자. 그래서 함양미달의 후보자들은 모두 쫄쫄이 타이즈를 입게 하자.

 

박 찬 현 군포시선거관리위원회 홍보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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