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지역의 3·1운동 하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이 제암리학살만행이다.
그 만큼 3·1운동에 있어서 제암리의 역사적 의미가 큰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화성지역의 3·1운동은 제암리에만 그치지 않는다. 화성주민들은 송산, 우정, 장안 등지에서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함으로서 화성주민의 역량을 전국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송산, 우정, 장안지역의 3·1운동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1919년 국내에서 전개된 3·1운동은 일반적으로 평화적인 만세운동의 형태로 이뤄졌다. 그런데 화성지역의 경우 송산면에서의 일제 순사부장 노구찌의 처단을 시발로 하여 가열차고 공격적으로 진행됨으로써 3·1운동의 신기원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공세적 특징은 당시 우정면과 장안면에서의 만세운동에서도 나타난다. 우정면 화수리에 있는 일본 파출소를 모두 불태운 일과 일본순사 가와바다의 응징이 그것이다.
화성지역 독립운동의 공격적 성격은 이 지역에 대한 일제의 탄압과 수탈이 그만큼 심했음을 반증해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서울과 인근한 화성지역은 왕실 또는 관청의 재산이 많았고 일제는 이를 토지조사사업이란 명분하에 수탈해 갔던 것이다.
결국 소작생활을 하던 다수의 농민들은 자신들의 생존의 기반을 잃었다. 결국 만세운동의 격렬함은 바로 농민들의 생존권투쟁에 기인한 것이었다.
화성지역에서 만세운동이 활발할 수 있었던 것은 주민들이 어느 타 지역보다 민족의식이 강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화성의 경우 유교적 바탕과 기독교, 천도교, 천주교 등 종교인들의 단합과 노력으로 다수의 대중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즉 이 지역의 만세운동은 다수의 주민들이 참여한 대표적인 시민운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이 지역의 만세운동에는 힘이 실렸으며 파괴력 또한 컸다.
제암리 사건은 3·1운동 기간 중 일제가 자행한 대표적인 만행이며 우리민족의 대표적인 수난사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 운동은 민족적 저항에 보다 무게가 실려야 한다.
발안 시위 중에 발생한 일본인 학교와 주재소·상가에 대한 공격은 일본의 침투에 대한 이 지역 주민들의 저항의식의 발로였다.
따라서 제암리 주민들의 발안 시위는 일본의 경제·정치·문화적 침략에 대한 저항운동의 성격을 지닌 것이며 제암리 사건은 이러한 저항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으로 빚어진 결과였던 것이다.
1892년부터 1934년까지 한국 선교사로 활동했던 미국의 아서 노블 선교사의 부인 마티 윌콕스 노블 선교사가 당시 한국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상세히 기록한 육필 일기에 따르면, 3·1운동 당시 제암리 교회뿐만 아니라 수원지방 16개 마을과 5개 교회에서 일제에 의해 학살이 자행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현재 알려진 29명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이렇듯 화성지역의 3·1운동은 전국에서 가장 활발히 전개된 대표적인 만세운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3·1운동은 일본의 은폐에 의하여 아직 그 전모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못하였고 그 위상 역시 올바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화성지역 3·1운동에 대한 보다 깊은 관심과 역사적 재평가 작업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아울러 화성지역 독립운동의 정신을 대내외에 널리 알리고 시민과 공유할 수 있는 홍보활동이 필요하다.
화성시에서 매년 시민, 학생과 함께 만들어가고 있는 3·1절 기념행사는 좋은 사례가 되고 있다. 또한 3·1운동의 성지인 이곳 화성에 전국적인 규모의 3·1운동 기념관이 세워지길 고대해 본다.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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