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조선의 새길을 열다’ 출간 의미 과제

그는 예언자였다. 아니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슬픈 예언자였다.

 

그는 ‘경세유표’를 탈고하고 서문을 쓰면서 “터럭만큼도 병통이 아닌 것이 없는 바 지금이라도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는 망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결국 그의 이야기대로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나라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백성들의 사람다운 삶을 위해 그는 유배지 강진에서도 끊임없는 실천행동을 통해 목민심서·흠흠신서·경세유표 등 세상을 개혁할 500여권의 서적을 완성하였다.

 

그 서적들을 통해 백성들의 의식은 성장하였고, 그의 후예들이 1894년 갑오농민전쟁의 주역이 되었고 일제 강점기 항일무장투쟁으로 나라를 되찾는 최전선에 서있었다. 그가 바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다.

 

올해는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 탄생하신지 2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을 정도로 당쟁이 극화되던 1762년에 다산은 오늘날 남양주시 조안면에 있는 생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탄생은 조선의 문명사의 새로운 시작이었다. 기존의 성리학에 물들지 않은 토목학, 건축학, 기하학, 물리학 등 다양한 학문을 익히고 있던 나주 정씨 집안은 그를 새로운 인물로 양성하였다.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주었고, 백성들의 고통스런 삶을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를 심어주었다.

 

당쟁의 혼란속에 당파가 다르면 한 고을에 살아도 평생을 눈인사 하지 않을 정도의 사회에서 그는 노론의 이덕무, 박제가, 박지원 등과 교류하며 사회 변혁운동을 시작하였다.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관직에 있는 기간에도 그는 개혁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가 기존의 인물들과 다른 것은 단연코 화성 설계를 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동서양을 넘나드는 학문적 기반이 18세기 동서양 성곽문화의 절정을 만든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만약 조금 더 관직에 남아 국가를 위한 중요한 정책을 추진하였다면 얼마나 이 나라에 도움이 되었을까 하는 아쉼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진정 다산 정약용으로 이름이 남는 것은 천하역적으로 몰려 유배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의 표현대로 그는 ‘겨를’을 얻어 실천적 학문을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온갖 어려움속에서도 제자들을 양성하고 그 척박한 곳에서 새로운 학문을 완성하였다. 그렇기에 분단된 현실에서도 남북 모두가 인정하는 최고의 학자가 된 것이다.

 

2012년, 다산 탄생 250주년이 되는 이 의미있는 해에 경기문화재단의 실학박물관과 경기일보가 다산의 생애와 사상을 정리한 ‘다산, 조선의 새 길을 열다’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다산 선생의 탄신 2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작년 한해동안 14명의 전문가가 다산의 삶과 학문에 대한 고민을 한 결과물인 것이다.

 

처음 이 기획에 참여하고 여러 편의 글을 실은 필자로서 이 책의 출간은 기쁘기 그지없는 일이다. 필자가 참여한 책이 출간된 것이 기쁜 것이 아니라 경기도민과 다산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수많은 이들에게 다산의 본 모습을 쉽게 이해시켜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산 선생은 책의 제목에서 말하듯이 조선의 새 길을 열어주었다. 그 길이 당쟁과 세도정치 그리고 일제 강점에 의해서 묻힌듯 싶지만 결코 묻히지 않고 오늘날까지 민족의 미래와 평화를 위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에 발간된 책의 의미는 각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산 조선의 새길을 열다’ 출간을 시작으로 해서 2012년에는 다양한 기념사업이 추진되었으면 한다. 다산의 학술 사상에 대한 재조명과 화성의 가치에 대한 재평가, 그리고 다산이 원하던 진정한 국가는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논의와 더불어 다산의 숨결이 깃든 남양주시와 수원시 그리고 전남 강진의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대동놀이를 펼쳤으면 하는 바람이 가득하다. 아마도 마재에 누워계시는 다산 선생의 뜻도 그러할 것이다.

 

김준혁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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