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이여, 야망을 가져라!” 꽤 유명한 말이지만 요즘 이런 말 잘 안 쓴다. 너무 한가한 소리로 들리기 때문이다. 대신 청춘을 일컫는 말로 등장한 새로운 용어들이 있다. 88만원 세대, 3포세대, 표백세대.
88만원 세대는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용어일 테다. 3포 세대는 조금 낯설고 표백세대는 아예 뜬금없는 말로 들릴지 모르겠다. 경향신문에서 공론화한 3포세대란 세 가지를 포기한 세대란 뜻이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했다는.
이어지는 표백세대는 뭘까? 한겨레신문사에서 주최하는 한겨레문학상의 올해(16회) 수상작의 제목에서 따온 말이다. 아니, 당선작 ‘표백’의 주된 논의이자 모티브가 바로 그것이다.
7,80년대나 90년대의 청춘들에겐 시대담론이라는 것이 있었고, 세상을 위해 그리고 국가를 위해 뭔가 해야 할 시대적 요청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게 독재타도였든 민주화였든, 경제 성장이었든, 노동권과 인권의 신장을 위한 투쟁이었든. 그러나 ‘지금, 여기’의 젊은이들에겐 목표가 없다. 거대담론이나 시대정신이 망실된 시대를 살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올 만큼 그들의 열패감과 패배감은 극에 달한 느낌이다.
<표백> 의 작가는 “이미 세상이 하얗게 표백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이룰 것도 변화시킬 것도 없다”는 의미로 표백세대라는 말을 탄생시키고 있다. 표백>
사는 게 팍팍한 건 청춘들만이 아니다. 20대가 88만원세대라면, 10대는 44 만원세대, 3,40대는 워킹 푸어(Work ing Poor), 4,50대는 ‘하우스 푸어’(House Poor)라는 용어로 불린지 오래다. 이른바 99%들이다.
반대편에 1%가 있다. 그들의 탐욕이 99%의 박탈감을 증폭시키고 끝내는 분노를 자극해 폭발하게 만든다. 모 코미디 프로그램의 풍자가 압권이다.
“50대가 되어 겨우 대기업 부장이 되고 나면 30대의 회장 아들이 상무로 올 터이니 50대 부장은 30대 상무에게 90 도 각도로 인사를 잘해야 명예퇴직의 칼날을 피할 수 있다”는 거다.
너무 우울한 얘기들이다. 그래서일까? 위로의 말들도 넘쳐난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을 들고 나선 김난도 교수는 “이리 갈까 저리 갈까 헷갈릴 때는 망설이지 말고 그대로 가라”고 조언한다. 갈팡질팡하고 방황하기엔 청춘의 시간들이 너무 아깝고 소중하기 때문이라는 거다.
절망의 20대를 겨우겨우 살아낸 뒤 맞닥뜨리게 되는 30대, 40대의 삶 역시 팍팍하고 힘들긴 마찬가지다. 시인 최승자는 오래전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는 말로 30대의 처연함을 읊조렸다.
‘마흔이 되어서도 내 마음이 이럴 줄 몰랐다’는 소설가 김형경의 진술은 2011년 신경숙에 이르러 다소 관조적으로, 그러나 명백한 패배의식으로 발전하고 있다.
“쓸쓸한 자유가 나쁘지 않고, 일상에 집중할 수 있으며, 어머니 생일을 챙기기 시작했”으며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으며, 여행지에서 전화통을 붙잡고 있는 대신 책을 읽을 수 있었으며 옛날 일을 떠올려도 웃을 수 있었다.”(신경숙 소설 <모르는 여인들> 중에서)고 한다. 모르는>
그러나 청춘은 단지 나이나 시기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무엘 울만의 시 <청춘> 은 두고두고 곱씹을 만하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이며 “누구나 세월로 늙는 것이 아니라 이상을 포기할 때 늙게 되는 것”이라 노래하고 있으니 말이다. 청춘>
임진년 새해가 밝았다. 60년 만에 찾아온 흑룡의 해라고 한다. 올해는 비상을 꿈꾸는 흑룡의 기운을 우리의 청춘들이 받아 안았으면 좋겠다. 이제 더 이상 아프거나 방황하거나 괴로워하는 청춘이 아니라 희망차고 복되고 비전과 웅비를 펼치는 청춘이길 바란다.
최 준 영 작가·거리의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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