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방돼도 다시 나라의 독립위해 싸우겠소”

수원시가 민선5기로 들어서면서 가장 중요하게 중심에 두고 있는 것이 ‘사람’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사람’이 중심이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급격한 도시변화 속에 오히려 사람이 소외되어 가는 많은 모습들을 겪어왔다. 그 만큼 정신보다는 물질이 우선시 되는 사회가 돼 우려스럽기까지 하다.

 

각박한 도시 변화 속에서 수원시는 사람을 중심에 두고 인문학의 부흥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난 215여년전 정조대왕이 참된 군주로서 백성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고자 했던 모습과 사람중심의 인문주의의 부활, 제2의 르네상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 중 수원만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과 자긍심을 찾기 위한 노력이 수원박물관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다. 수원지역의 광범위한 전통과 자료를 찾아내고,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발굴과 새로운 조명을 통해 수원시민으로서 자부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수원박물관의 수원학 연구의 결실로 이어지고 있다. 17 일 오후 3시부터 수원박물관이 주관하는 ‘사람향기 나는 문화도시 조성을 위한 수원지역 인물 재조명 심포지엄 - 수원을 빛낸 항일독립운동가’는 그런 의미에서 뜻 깊은 연구 결과를 도출해 냈다. 바로 경기도의 유관순으로 불리는 이선경 열사에 대한 사망확인과 후손 확인 등 새로운 자료의 발굴이다.

 

“석방되도 다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겠소!”, 이 말은 경기도의 유관순으로 불리는 수원 출신 이선경 열사에게 따라 붙는 단호한 외침이다. 실제 심문조서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직접 이 열사가 했던 말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 열사가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48인의 한명으로 기독교측 대표이자 수원 삼일여학교 교사였던 김세환의 지휘 아래 각지의 연락임무를 담당했다는 것은 익히 밝혀진 사실이다. 이 열사는 임순남, 최문순과 함께 박선태, 이득수를 중심으로 1920 년 항일비밀결사인 구국민단(救國民團)을 조직, 활약했던 수원지역의 대표적인 항일독립운동가이다.

 

이선경 열사는 1902년 5월25일 수원면 산루리(현 수원시 팔달구 중동)에서 이학구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비교적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삼일여학교(현 매향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해 1919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기여고)에 입학하여 3·1운동과 구국민단의 활동 속에 1920년 8월 퇴학당했다. 3·1운동 이후 구국민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 1920년 8월 박선태, 이득수, 임순남 등과 함께 체포돼 옥고의 과정 속에서 재판장에 나오지 못할 정도로 심한 고문을 당하여 궐석 재판을 받았다. 하지만 이 열사의 사망 자료를 찾지 못해 옥중 고문에 따른 순국을 몇몇 학자들이 추측할 뿐이었다.

 

이 열사가 사망한지 90년이 흘렀지만 끊임없는 수원학 연구의 결과로 그의 순국 사실을 제적부를 통해 확인하게 된 것은 경사가 아닐 수 없다. 이 열사는 8개월간 옥고에서 고문을 당한 뒤 1921년 4월12일 궐석재판 끝에 징역 1 년 집행유예 3년을 받고 풀려났고, 옥중에서 풀려난지 9일만인 4월21일 수원면 매산리(현 매산동)에서 새로운 세상을 마음 속에 품고 순국했던 것이다.

 

제72주년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개최되는 수원박물관의 ‘수원지역 인물 재조명 심포지엄’이 이선경 열사의 순국을 확인하는 자리가 돼 매우 뜻 깊다. 이런 수원학 연구의 결과들 속에서 나라를 빼앗겼던 시절 우리 시의 중요한 항일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되새겨보는 이번 심포지엄이 사람의 존엄과 가치를 소중히 하는 인문학 도시 ‘수원’을 만드는 기초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송영완 수원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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