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제도 개혁, 견제와 균형의 원칙으로

지난 5·6 정무위 소속 지역 국회의원을 면담하러 온 저축은행 피해자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구멍가게를 운영하며 힘들게 모은 1억원의 돈을 이자 더 받고자 저축은행에 맡긴 것뿐인데 왜 내가 이런 피해를 봐야 하냐”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금감원은 ‘천추의 한’으로 남을 것이다.

 

금감원 비리의 가장 큰 구조적 원인은 ‘권력의 집중’이다. 1998년 설립 후 금감원은 금융계에 있어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이었다. 기존의 4개 감독기관이 상호 견제해 균형을 유지하던 틀을 깨고 효율을 높이고자 1개로 통합한 것이 화근이 된 셈이다. 민주주의의 근간인 ‘견제와 균형의 원칙’에 반하였기에 작금의 사태가 발생했고 결국 위와 같은 선량한 서민들이 피해를 본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 ‘견제와 균형의 원칙’이 배제되는 곳이 하나 있다. 바로 사법제도이다. 특히 수사권과 기소권은 현행법상 ‘검사’만이 가지고 있을 뿐이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법무부 소속 검찰이 행안부 소속 경찰을 수사에 있어 ‘지휘’하고 경찰은 이에 ‘복종’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행법이 대체 어떻게 생긴 것인가? 형사소송법의 연혁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일제시대 식민통치 강화를 위해 통제가 편한 현 제도를 도입하게 됐고 이 잔재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전제국가 시절에나 있을 법한 구시대적 법률로 대한민국은 반세기 이상을 살아 왔다. 무소불위 검찰의 개혁에 대해 끊임없이 논의는 돼왔으나 ‘수사’라는 거대한 힘에 그간 좌초돼 왔다.

 

이번 사개특위 논의도 용두사미가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특히 경찰의 ‘복종의무 폐지’와 ‘수사 주체로의 인정’은 현실을 법제화 하자는 것일 뿐인데도 검찰의 현행법 고수 입장은 강건하다.

 

현재 경찰은 대한민국 수사 중 약 98 %를 현장에서 직접 위험을 무릅 써가며 해결하고 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일을 하다보면 자신의 틀에 갇혀 미흡할 수 있다. 그렇기에 외부의 조언자가 필요하다. 검찰 역시 기소 유지를 위한 보강 수사나 법률 검토, 인권침해 우려 부분에 있어 충분히 경찰을 감독하고 조언해 줄 수 있다.

 

그러나 ‘검사만이 수사의 주체이며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이 밝혀내고 있는 실체적 진실을 축소하라 지시하거나 특정인에게 혜택을 주는 행위는 국민이 준 수사권을 남용하는 것이다. 경찰이 잘못한 부분에 있어 검찰은 지적할 수 있으나, 검찰이 잘못한 부분에 있어 지적할 수 있는 경찰은 없다.

 

아무리 깨끗한 물일지라도 고이면 썩기 마련이다. 아무리 독야청청의 성인군자가 모였다할지라도 견제가 없다면 흠이 생기지 않겠는가.

 

검찰이 그토록 주장하는 ‘사회 정의 실현’은 검찰이 쥐고 있는 그 독점의 끈을 놓았을 때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저축은행 사태처럼 그 피해가 고스란히 서민에게 전가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300여년 전 몽테스키외가 외친 ‘견제와 균형의 원칙’이 아직까지도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고 있음은 검찰 스스로 돌아봐야 할 것이다.

 

이창민  용인동부경찰서 정보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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