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치의 움직임을 분석하는 틀로서 지정학만한 것이 없다. 리비아에 대한 다국적군의 공습은 석유, 투자, 난민 등 리비아와 지리적, 경제적으로 이해관계가 높은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가 앞장서고, 미국이 이를 지원하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과거 알제리 튀니지, 이집트 등 대부분의 북아프리카를 식민지배 했으며, 이 가운데 프랑스는 리비아의 석유산업에 대거 투자했었다. 이탈리아는 리비아를 식민지배 했으며, 전쟁난민 문제에 민감하다.
물론 리비아 공습은 지난 3월17일 있었던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른 것으로 민간인 보호를 위해 도덕적·국제법적 정당성을 지닌다. 그러나 리비아사태의 장기화로 그 장래가 불투명한 상태에서 이탈리아에서는 북아프리카 민주화 이후 현재의 유럽연합을 ‘유럽 및 지중해 연합’으로 확대개편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 주장 역시 지정학에 따른 것이다. 지중해(地中海)는 ‘땅의 중심’이란 뜻으로 그리스·로마시대에는 유럽문명의 중심이었기에, 유럽과 정치·경제적으로 통합하자는 것이다.
이에 비해 미국은 전략적 이해관계가 중동전역은 물론 전 세계에 걸쳐있는 예외적 국가(American exceptionalism)다. 다만, 최근에는 국내문제 해결에 우선순위를 두며, 미국이 언제까지 세계의 경찰로서 모든 책임을 질 것인가에 대해 회의론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필자는 지난 3월24일부터 30일까지 한·미의원외교협의회원으로서 뉴욕과 워싱톤을 방문해서 미국조야의 지도자를 만났다. 커트캠벨 미국무부 동아시아 차관보와는 28일 조지타운대에서 만나 ‘리비아 사태를 보는 아시아’에 대한 그의 견해를 들을 수 있었다.
캠벨 차관보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는 석유생산국이며 이슬람국가이므로 미국이 리비아처럼 언젠가 자기네 나라를 공격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에 빠져있는 반면 싱가폴은 오히려 미국이 중동사태에 빠져서 아시아에 관심을 덜 갖게 되지 않나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캠벨 차관보는 이어서 “일본은 대지진으로 경황이 없기 때문에, 동남아 국가들은 한국이 중국의 부상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주기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동남아 국가들 사이에는 ‘중국 위협론’이 있다. 아세안의 맹주를 자처해온 인도네시아는 그동안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해왔고, 싱가포르는 강대국 간 세력균형을 외교기조를 삼고 있으며, 중국과 전쟁까지 치른 베트남도 중국의 부상에 거부감을 갖고 있다. 특히 중국은 지난해의 경우 우리나라와는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사건 때 북한 편들기로 갈등을 빚었고, 일본, 베트남,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과는 댜오위다오(釣魚島)와 남사군도, 서사군도의 영유권을 놓고 분쟁을 벌였다. ‘한국역할론’은 캠벨 차관보의 전언이지만, 미국이 중동전쟁으로 힘의 공백을 보일지 모른다는 동남아 국가들의 우려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 방미기간 중에 만난 헨리 키신저 박사는 “중국이 아시아 각국과 마찰을 빚으면서 한·미·일·아세안 국가들 사이의 동맹관계는 더욱 공고해졌다. 이러한 형세는 1차 세계대전 직전 유럽과 비슷하다.
당시 독일이 영국과 프랑스에 대해 대결구도를 취하면서 영·프 양국이 동맹을 맺어 독일을 공격했다. 현재의 중국이 독일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물론 ‘한국 역할론’은 중국의 대외정책이 도광양회(韜光養晦·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에서 대국굴기(大國?起·큰 나라로 우뚝 섬)로 이동하면서, 아시아에서 미·중간 전략적 이해의 충돌 속에서 나온 것이겠지만, 21세기 초반 세계의 지정학이 그만큼 요동친다는 방증이다. 한미동맹의 기반위에서 아세안과의 교류를 강화하면서도 중국과 적대하지 않는 우리의 지정학이 필요한 때이다.
홍일표 국회의원(한·인천 남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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