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인터뷰] 박범훈 중앙대학교 총장
풍광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경기도 양평 작은마을에서 모든 소리를 벗삼았던 소년은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근대음악사에 한 획을 그었다. 부드러운 입매와 대조되는 날카로운 눈매에선 예술가적 감수성을 넘어 CEO로서의 강한 리더십을 읽을 수 있다. 예술가에서 행정가로 변모했지만 보기좋게 흐트러진 백발을 쓸어넘기며 “음악은 나를 미치게 한다. 뛰어 나가고 싶다”고 서슴없이 말할 정도로 여전히 식지않은 예술가로서의 열정만큼은 숨기지 못했다. 한 사람에게서 동시에 느껴지는 다양한 이미지는 지금까지의 삶을 후회하지 않는 자신감에서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예술인 출신으로 종합대학 총장을 맡아 화제가 됐던 박범훈(62) 중앙대학교 총장. 서울국악예고에서 피리를 배우는 것으로 국악계에 첫 발을 들여놓은 후, 2004년 소리인연 40년에 이어 이듬해 중앙대 총장에 올라 지난해 재선임 되기까지 그는 어떤 삶을 살아 왔을까.
- 성장배경이 궁금하다.
‘미꾸라지가 용이 됐다’고 말한다. 예전에는 가능했다. 시대적으로 고생도 다 함께 하고 함께 굶고 그랬던 시절이었지만 요즘에는 투자하지 않으면 안되는 세상 아닌가. 그런 시대 덕에 대학총장까지 된 것 같다.
물론 음악은 운명이었다. 양평군 강산면,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그곳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음악을 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풍금도 치고 노래도 곧잘하고 중학교 때에는 밴드부에서도 활동했다. 소리에 이끌려 쫓아갔던 남사당패가 완전히 문을 닫고 정착할 즈음, 인간문화재(60년대 초) 지정을 받기 위해 서울을 다녀오셨던 신승환 선생님의 추천으로 지금의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의 교장선생님을 소개받아 본격적으로 음악을 공부했다. 이후 중앙대학교 서양음악과에서 작곡을 공부하고 일본의 무사시노대학원으로 유학을 갈 예정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중앙대를 인정치 않아 시험을 치르고 1학년부터 다시 시작해 10년간 공부를 해야 했다. 그렇게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모교에서 교수활동과 작곡활동을 하다보니 어느새 학교행정일을 맡았고, 하다보니 총장도 벌써 6년째 하고 있다.
- 시골아이에서 국가 대표 음악인, 총장까지 하게 됐다. 분명 강점이 있었을 거다.
잘하니까 그런거 아니겠나(웃음). 사실 총장을 길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중앙대 역사덕이다. 전 이사장이 학교를 운영하려는 상황에서 어려움에 처했을 때, 모교 출신인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어려운 시기에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은 것 같다. 게다가 자금이 부족한데도 병원을 짓고 재단이 바뀌는 과정의 한 가운데에서 믿을만한 사람으로 다시 한 번 주목받았다. 현재 두산 법인이 개혁하는 과정에서 학교를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해서 붙잡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새 재단이 자리를 잡은 만큼 나보다 더 좋은 총장이 와서 학교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재단 이사장에게 말하곤 한다.
- 이명박 대통령 취임준비위원장을 하면서 항간에 입각설도 나돌았다.
나는 전두환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 취임 당시에도 작곡하고 지휘를 했다. 국가에 큰 행사가 있으면 그 쪽에서 알맞다고 판단해 부탁받아 했던 것이고, 이명박 대통령은 서울시장 재직시 예술위원을 했던 인연에 부탁받아 내 전공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다. 내 전공이 아닌 부분에서 입각설은 말도 안된다. 나같은 양평 시골 아이가 대학총장까지 했으면 됐다고 본다. 옛날로 치자면 집안에 대제학이 나오면 정승보다 높게 봤다. 지금 대제학은 총장이니, 이 이상의 가문의 영광도 없지 않은가. 게다가 정치는 내 전공도 아니다.
- 대학총장의 역할은 뭐라 생각하는가.
지휘자로서 앙상블을 만드는 것이 내 전공이다. 즉, 새로운 것을 만들고 그것을 화합하는 것이 전공인데, 대학총장의 업무는 작곡과 지휘가 맞물린 것이라 생각한다. 그 덕을 봤다. 오케스트라는 자기를 낮추고 화합해야하는데 대학에는 솔리스트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거대한 조직은 혼자서 할 수 없으므로 지휘자의 역할이 중요하고, 총장은 시스템으로 관리하는 것이지 세부적으로 관여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결국 조직관리가 중요한 셈인데, 지휘봉을 들면 파트장과 교감했던 음악인의 역할이 이어지는 것 같다.
- 최근 중앙대가 재단이 바뀐 후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가시적 성과는 무엇인가.
성과에 대해 대학에 멋진 건물을 지어주는 것으로 말하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흩어져 있던 모든 구성원들에게 뭉칠 수 있는 중심이 생겼다는 것이다. 올해 6월, 18개 단과대학의 77개 학과(부)를 10개 단과대학의 47개 학과(부)로 조정하는 사업을 단행했다. 사실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인데도 모든 구성원이 서로를 믿기 때문에 일사분란하게 같은 마음으로 진행됐다. 중심이 선 이후 교육환경이 좋아지면서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오는 등의 변화를 보면서 조직 구성원들이 응집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립대학으로 재단이 튼실하다는 것은 교직원과 학생 모두에게 희망을 줬고, 만연했던 개인주의가 사라져 공통의 목적이 생겼다는 것이 가장 큰 성과다. 특히 재단측에서 국내 일류대학, 세계적 대학을 만들겠다는 육영의지가 강해 총장이 나서서 투자를 사정하기 전에 먼저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줘 기분이 좋다.
- 중앙대를 세계 일류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밝혔는데, 현재 어디까지 와 있다고 보는가.
대학은 뿌리가 중요하다. 사실 중앙대는 24년간 침체돼 있었다. 과거에는 연·고대 다음으로 중앙대를 쳤다. 지금의 우리는 과거 선배들이 누렸던 옛날 명성을 되찾자는 것이다. 물론 긴 침체기가 전 재단의 잘못만은 아니다. 재단이 바뀌는 과정에서 행정적 문제가 발생했고, 좋은 교수와 인재들이 학교를 찾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그 긴 시간의 어려움이 최근 새 재단이 들어온 2년만에 많이 바뀌었기 때문에 희망이 보인다. 두산둥이(두산이 재단이 되면서 입학한 학생)들이 졸업할 즈음에는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수준에 올라가지 않겠는가. 4년 후에는 국내 사립대학 5위안에는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본다.
- 학교 발전을 위한 일도 많지만 가끔 지휘자로 무대에 서는 걸로 알고 있다. 기분이 어떤가.
정말 나를 괴롭힌다. 말만 들어도 뛰쳐나가 음악생활을 하고 싶을 정도다. 지난해 제주도에서 열린 한아세안정상회담때 11개국의 연합오케스트라를 연습시켜 ‘아시아’라는 자작곡을 보여준바 있다. 하지만 이제 악보를 보면 결재판으로 보이고 힘도 없으니(웃음), 어쨌든 예술활동은 계속할 것이다.
- 예술판으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중앙대가 많이 변화하고 있지 않은가. 과거 예술계를 비롯해 약학, 신방과, 경상계열이 인기였는데 두산이 이공계에 대한 투자가 많을 것이라는 기대심리도 변화의 한 축이다. 어떠한가.
현 공대 체제로는 인기과를 만들 수 없다고 판단했다. 앞서 말했듯이 대학 전체를 구조조정하면서 안성캠퍼스에 있는 유사학과는 통폐합했다. 시대가 바뀌었고 학문도 발전했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지식도 단순 기술에서 나아가 미래지향적인 것을 원한다. 많은 학생이 몰렸던 과거 광산학과가 지금 이 시대에 존속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현실에 맞춰 비행기와 자동차 만드는 것을 알려줘야지, 마차 제작만을 고집할 순 없다. 공대에도 이런 시대적 수요와 욕구를 고려해 신학문단위로 재조정했고 미래지향적인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 서두에 민감한 문제라고 하셨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도민들의 관심이 안성캠퍼스의 하남 이전에 쏠려 있다. 안성주민들의 반대의 목소리도 크다.
예술가 총장에 초점을 맞춘다고 해 인터뷰에 응했다. 내 말이 신문에 나가고 나면 또 한바탕 시끄러워 질 거다. 시끄러워도 할 수 없다. 우선, 안성시민과 안성 지역을 위해서라도 이야기해야 한다.
안성캠퍼스의 하남 이전은 전 재단 이사장과 현 재단의 약속이다.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전 이사장이 학교를 두산에 넘기면서 하남에 신캠퍼스를 지어주는 것을 조건으로 계약했다. 박범훈 개인이 한 일도 아니고 박용성 이사장이 한 일도 아니다.
재단측 입장에서만 보면 시민들이 반대 목소리를 내는데 조용히 안성에 있는 것이 오히려 좋지 않겠는가. 재단 인수인계 과정에서 장학재단을 설립하고 근교에 학교를 지어주는 조건을 약속했던 것이다.
- 하남 이전이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는 뜻인가.
중앙대는 하나다. 재조정한 중앙대 학문은 크게 5개 계열이 있는데, 흑석동 서울캠퍼스가 좁아서 이 학생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는 처지다. 지방캠퍼스 개념이 아니라 각 계열에 필요한 공간을 마련하는 것 뿐이다. 이 다섯개 계열 중 한 두 계열씩을 통체로 각 캠퍼스에서 운영할 예정이다. 모체는 서울로 하되, 각 계열을 분산시키는 것이다. 이는 오히려 서울중심의 기존 학문단위를 지방으로 이전하는 것이다.
안성의 경우 안성캠퍼스에 안성지역학생이 들어오면 좋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통학하자니 멀고 기숙생활을 하자니 가까운 지리적 특수성 때문에 8천명이 다니는 안성캠퍼스에는 월화수만 있고 나머지 날짜에는 공동화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학부모들마저도 같은 중앙대임에도 질이 떨어진다고 주장하는 판국이다. 평택역으로 전철이라도 놔준다면 그 좋은 곳을 왜 빠져나오겠는가. 실제 안성캠퍼스 주변 원룸 건물주들은 실질적으로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원하고 있다
그런데도 지역에서 잘못된 이야기들이 퍼지고 무조건 안된다고만 하니 안타깝다. 계속 접촉은 시도하고 있다. 반대하는 이들의 심정도 이해가 가지만 모든 것을 벗어나 정말 안성과 시민을 위한 방법을 고려하고 있으니, 무엇보다 만나서 협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안성을 사랑한다. 안성바우덕이 축제도 내가 기획했다. 내 딸도 안성캠퍼스에 입학시켰다. 안성캠퍼스의 하남 이전과 인천 검단캠퍼스 조성 등 일련의 사업에 대해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 하남은 과밀억제지역이다. 이전이 어려울수도 있다고 들었다.
9만평의 현 콜먼기지에는 우리가 캠퍼스를 조성할 수 있다. 서울이 5만여평, 안성이 45만여평인데 서울에서 모든 학생을 수용할 수 없으니, 하남과 검단캠퍼스 조성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남 캠퍼스 예정지 주변의 15만평을 개발제한구역에서 해제하는 것은 대학이 아닌 ‘대학타운’을 조성하는 시의 의지가 반영된 부분이다.
이같은 투자와 지원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주한미군 특별법도 오랜 세월 미군주둔으로 인해 황폐해진 지역을 발전시켜보고자 배려의 목적으로 마련된 법안이다. 이를 위해 공장, 학교의 이전 등이 가능하도록 지원 규정을 특별히 포함시켰다.
만약 안성시 김학용 의원이 행정안전위원회에 발의한 법안이 통과된다면 경기 지역의 주한미군부지 활용을 통해 피폐해진 지역 여건을 개선하고자 하는 상당수의 지자체들이 큰 피해를 볼 것이다. 최근 동두천 사태만 봐도 알 수 있다.
-인천의 검단캠퍼스는 2015년 개교 예정이다. 마음이 급할 것 같다.
전 안상수 시장은 2014년 아시안 게임에 맞춰 체육대학을 유치하고 싶어했다. 우리 캠퍼스 안에 그것을 지으려고 서둘렀던 것이다. 시장이 바뀌었지만 신도시에 병원과 대학을 유치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일리 없다. 인천시가 캠퍼스 건립을 위해 건립비 2천억 지원을 포함한 적극적 제안을 해왔고, 이를 우리 대학이 선택한 것이다.
또 하남의 대안으로 인천캠퍼스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흑석캠퍼스를 중심으로 서쪽으로 인천캠퍼스, 동쪽으로 하남캠퍼스를 세워 글로벌 캠퍼스를 조성한다는 방침이다. 세계적인 명문대학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인천시는 검단신도시 1지구 1단계 완성을 2014년으로 계획하고 있는데 우리 검단캠퍼스를 1단계 사업에 포함시켜 동시 착공을 약속했다. 이에 2015년 개교가 가능하겠지만 공식적으로 2016년 개교를 목표로 추진 중에 있다.
- 학교 얘기 말고 개인적으로 하고싶은 일은 없는가.
양평에 개인적으로 연수원을 짓고 있다. 야외무대까지 2개 동을 지어서 예술원으로 운영할 계획인데 절반은 제자들이 활동하는 (사)중앙국악예술협회에 기증하고, 나머지는 학교에 기증해 사회교육본부에서 각각 운영하게 할 계획이다. 나는 2층에 조그마한 작곡방 하나만 만들어 죽을때까지 쓰게 해달라고 했다. 죽고나면 그것도 누군가가 쓰겠지만. 그 곳에서 학생들도 가르치고 작곡 활동도 하고 싶다. 아니 근데 너무 많이 물어봤다. 인터뷰를 이렇게 길게 큰소리로 흥분해서 하는 것도 처음이다.(웃음)
대담=박정임문화부장 bakha@ekgib.com
정리=류설아기자 rsa119(@ekgib.com
2002 월드컵 개막곡 등 작곡 국악 대중화·세계화 큰 기여
양평 출신이다. 서울국악예고에서 피리를 배우는 것으로 국악계에 첫 발을 내딛었으며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음악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 무사시노 음악대학과 대학원에서 작곡과 음악학을 공부했다. 귀국 후에는 모교인 중앙대와 서울대 음악대학에서 강의했다.
1980년 손진책, 국수호 등과 손잡고 시작한 마당놀이는 인기 코드가 된지 이미 오래다.
86 아시안게임 개막식 작곡 및 지휘를 시작으로 1987년 중앙국악관현악단을 창단했으며 이듬해인 88년 서울올림픽 음악을 만들었다. 2002 한일월드컵, 대구유니버시아드 개막식 음악 등에도 꾸준히 참여하며 우리 소리의 세계화에 힘을 쏟았다. 1993년 아시아민족악단을 창단했고 1995년에는 국립국악관현악단 초대단장으로 취임했다.
저술활동도 활발했다. ‘피리 산조 연구’, ‘작편곡을 위한 국악기 연구’, ‘한국 불교음악사 연구’ 등을 펴냈다. 2004년 미발매된 음원까지 총정리한 음반 ‘박범훈의 음악세계’를 30여 장으로 출시하기도 했다.
이같은 음악적 성과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국민훈장 석류장’, ‘대한민국 문화예술인상(대통령상)’, ‘대한민국 작곡상’ 등 화려한 수상이력을 자랑한다.
2000년 중앙대 부총장을 역임했고 소리와 연을 맺은 지 40년이 된 2004년 중앙대 총장 자리에 올라 음악인과 행정 전문가로서의 역량을 맘껏 펼치고 있다.
감성이 지배하는 예술 분야와 이성이 지배하는 행정 분야, 이 두 가지를 빠르게 그러나 조화롭게 한 곡의 교향곡처럼 지휘하며 살고 있다.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