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역과 수의자의 고뇌

새벽 5시, 포천 구제역 재난상황실. 벌써 며칠째 뜬눈으로 아침을 맞이했는지, 오늘이 며칠이고 무슨 요일이며 휴일은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동물을 사랑하고 건강을 돌보며 아픈 가축의 고통을 치료해 다시 인간과 교감을 갖도록 해주는 것이 수의사의 일이라는 것은 새삼스럽게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수의사 본연의 일과는 정반대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1991년 경기도축산위생연구소에 임용됐다.

 

국민에게 안전하고 위생적인 육류 공급을 위해 피비린내 나는 도축장에서 사람들이 먹어도 안전한지 소, 돼지의 생체 및 해체 검사를 한다. 도축장에 끌려온 소들 중 일부 눈치 빠른 녀석은 나를 응시하면서 벌써 삶의 마지막 현장이라고 느낀 듯이 눈물을 흘린다. 그래도 지금껏 그래 왔듯이 너무도 당연히 도축 명령을 내려 삶을 마감시킨다.

 

또한 질병에 걸린 가축을 치료해 그들의 삶을 정상적으로 영유하게 하는 일 보다는 일명 ‘인수공통전염병’이라고 불리는 결핵병, 브루셀라병 등을 검사해 그 질병에 걸린 가축들의 삶을 마감시킨다. 사람의 건강과 먹을거리 안전, 질병 확산 방지를 위해 나는 수의직 공무원으로서….

 

경인(庚寅)년 새해,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새로이 마음을 다짐하는 희망찬 1월의 시작, 포천에서 구제역이라는 질병이 8년 만에 다시 발생했다. 힘들고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한다는 불안감이 또다시 쓰나미처럼 강력히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 질병은 소·돼지 등 발굽이 둘로 갈라진 우제류 동물에서 전파력이 매우 빨라 국제수역사무국(OIE)에서 특별히 관리하는 A급 중에서도 첫째 가는 악성 가축전염병이다. 국내에서 2000년에 24일 동안 15건, 2002년에는 52일 동안 16건이 발생해 당시 방역관으로 직접 현장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일단 구제역이 발생하면 모든 직원은 정규 사업을 완전히 미루고 우선 구제역 차단 방역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과거에는 봄에 발생했으나 올해에는 유난히도 춥고 눈이 많이 내리는 1월 초에 발생해 영하 20도가 오르내리는 칼바람 추위와도 싸워야 하는 이중고의 고통을 톡톡히 겪어야만 했다.

 

구제역 발생 시 가축방역관이 해야 할 일은 너무도 많다. 현장 출동에서 방역 마무리까지, 이 중에서 가장 하고 싶지 않는 일을 꼽으라면 아마도 살처분(殺處分)일 것이다. 그러나 날뛰는 소 뒷발에 차이고, 안락사 주사제의 안전사고를 감수하면서 밤이건 낮이건 처리해야만 했고, 올해에도 그 수가 무려 53농가 5천754두에 달했다. 모두의 노력과 사명감으로 이번은 포천·연천 지역에서만 발생한 채 이제 서서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것은 민·관·군 모두가 혼연일체가 되어 사생활을 반납하고 불철주야 차단방역에 총력을 기울여 조기에 종식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강력히 전달된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에서 나온 간절한 결실이라 하겠다. 특히 포천과 연천 주민들이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적극 협조해 준 덕분이다. 따라서 중앙정부에서도 해당 지역주민들에게 최소한의 보상도 뒤따라야 하겠다.

 

2개월 이상 취해졌던 이동통제소가 점점 줄어들고 상황실 일지의 내용도 점점 간소화되어 간다. 맑고 따스한 봄의 햇살이 내 살결을 살며시 스쳐 지나가 가슴 속에는 평온함이 어느덧 자리를 대신 메우고 멀리서 들려오는 송아지의 울음소리가 사뭇 아름답다.

 

/서영석 道제2축산위생연구소 북부지소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