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신문의 부고란을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평소 알고지내던 사람들이 한 사람, 두 사람 자신의 생의 마감을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부고는 짧은 글로 고인의 나이와 직업, 그리고 남은 가족들, 발인장소와 일시에 대해 알려주고 있다. 전에는 이것이 남의 일인냥 하여 지나쳤지만 이제는 새삼 나의 일로 다가온다. 나도 언젠가는 인생을 마감하면서 짧은 글로서 나의 죽음을 고지하지 않을까?
납관부 일기(納棺夫 日記)는 아오키 신몬이 10여년간 장례회사에서 납관부로 일하면서 쓴 일기와 산문을 모은 책이다. 납관부(納棺夫)는 요즘 우리 식으로 하면 ‘장례지도사’다. 시신을 깨끗하게 닦고 정갈하게 손질과 화장을 한 후 염습을 하여 입관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사업에도 실패하고 문학가로도 별볼일 없던 저자는 우연히 아기 분유값이라도 벌어오라고 바가지를 긁던 아내가 내던진 신문의 구인광고를 보고 납관부일을 하게 된다. 항상 죽음과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죽음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일을 하는 자신을 보게 된다. 아울러 죽음을 기피해야만 할 ‘악’으로 생각하면서 ‘생(生)’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현실의 모순을 보며 죽음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언젠가 저자는 심하게 부패한 독거노인의 시신을 수습하며 엄청나게 슬어버린 구더기들을 처리하느라 진땀을 흘린다. 빗자루로 연신 쓸어내면서 그는 죽은 이의 몸에서 생겨난 작은 생명체들도 단 며칠이라도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며 빗자루를 피해 구물구물 기어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죽음은 생명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끈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여하한 경우에도 태연하게 죽을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겼으나 잘못된 생각이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여하한 경우에도 태연하게 살아가는 일이었다’라는 옛 수행자의 뜻을 체득하는 과정은 그의 죽음에 대한 성찰을 잘 표현하고 있다. 수명은 영어로 ‘life expectancy’이다. 자기가 얼마정도 살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수명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 기대를 예측불가능하게 다가와 사정없이 무너뜨리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 가끔 가다 스스로 ‘지나치지 않은가?’ 할 정도로 업무와 일상에 몰입하는 자신을 들여다 본다. 혹은 ‘왜 사느냐?’하는 인생의 의미가 서늘하게 다가와 뒤를 돌아 보기도 한다. 숨가쁘게 경쟁과 효율을 추구하는 바쁜 일상속에서 의도적이라도 한번 정도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정신없이 달려가는 우리의 삶에 조용히 정지신호를 보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죽음은 명리(名利)의 큰 산에 미혹된 헝크러진 우리의 마음에 존재의 근저를 들여다보게 하기 때문이다.
20대에는 묵자의 치열함으로 살고, 30대는 한비자의 엄격함으로, 40~ 50대는 공자와 맹자의 노련함으로 살고, 60대 이후에는 노장의 사상을 받아들여 여유와 유유자적, 무위로 살아가라 했는데 불현듯 죽음을 생각하니 지금의 이 시간들이 너무나 아깝고 귀하게 생각된다. 평소 죽음을 생사일여(生死一如)의 자세로 담담하게 미학적으로 받아들여온 필자는 불현듯 분기가 일어난다. 창밖에는 벌써 봄날의 새 기운이 알게 모르게 밀려오고 있지 않은가? 지금 이순간 뒤엉켜 살아가고 있는 같은 민초들의 냄새나는 살맛을 느끼고 싶다. 이승에서 함께 뒹구는 개똥밭이 얼마나 좋은 것이냐. 여하한 경우라도 태연하게 살아가기를 원하는 아오키 신몬의 죽음에 대한 사념은 생과 사가 눈과 비가 함께 엉클어져 내리는 진눈깨비로 표상되어 다테야마 마을을 조용히, 그리고 끈질기게 내리고 있듯이 필자도 비록 중후반의 장년기이지만 아직까지는 20대의 묵자처럼 치열하게 이 봄날을 맞이하고 싶다.
/김 우 자혜학교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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