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가을이 무르익을 무렵, 단양군에서는 온달문화축제가 열린다. 신종플루로 취소된 올해의 행사가 14회가 될 예정이었다. 단양군에서 온달문화축제가 열리는 까닭은 온달이 쌓았다고 하는 온달산성이 단양에 있고, 온달 동굴과 온달 공깃돌 바위 등 온달과 관련된 이름이 단양 곳곳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온달은 ‘삼국사기’ 열전에 수록되어 있는 고구려 평원왕 때의 인물로, 가난하고 못생겨서 ‘바보온달’이라고 놀림을 받았지만 마음은 밝고 총명했다고 한다. 온달의 사람됨을 알아본 평강공주가 온달을 훈련하여 북주(北周)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우도록 했고, 이로써 온달은 왕의 사위로 인정받는 자리에까지 이른다.
평원왕의 뒤를 이은 영양왕 때에 신라에게 빼앗긴 죽령 이북의 땅을 되찾기 위해 출정했던 온달은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신라 군사들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게 된다. 장사를 지내려 하는데 관이 꼼짝도 하지 않아서 평강공주가 관을 어루만지며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이제 그만 돌아갑시다”고 하자 비로소 관이 움직였다고 한다.
이러한 온달의 일생은 매우 감동적이다. 그의 인생역전은 어려운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었으며, 그의 뜨거운 애국심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그래서 온달은 우리 국민이 사랑하는 역사 인물 중 한 사람이 됐다.
그런데 단양이 정말 온달과 관련이 있는 곳일까? 민속학적으로는 ‘그렇다’일지 모르지만 고고학적으로는 ‘아니다’다.
온달이 쌓았다고 하는 온달산성은 전형적인 6세기대의 신라산성이다. 높고 견고하게 쌓은 석축 성벽과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현문식 성문, 성 내에서 출토되는 유물 등은 이 산성이 온달이 쌓은 성이 아님을 말해 준다. 그리고 영양왕 원년(590년) 온달이 신라를 공격했다고 했지만, ‘삼국사기’에는 이 시기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한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다. 이러한 자료는 단양이 온달과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렇다면, 온달이 전사했다고 하는 아단성(阿旦城)은 과연 어디일까? 475년 장수왕이 한성 백제를 공격해 개로왕을 처형한 곳이 바로 아단성이다. 아차산성이 원래는 아단성이었는데 태조 이성계의 이름인 단(旦) 자가 이름에 들어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차(嵯)로 고쳐 썼기 때문에 지금의 아차산성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1998년, 서울대학교 박물관이 아차산성을 발굴하는 중 ‘北漢’이라고 쓰인 명문 기와가 출토됨으로 인해 신라의 북한산성은 바로 아차산성이었음이 밝혀지게 됐다. 신라는 백제의 아단성을 석성으로 개축하고 북한산성이라고 이름붙였던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영양왕 14년(603년) 고구려의 북한산성 공격 기사가 등장한다. 영양왕이 고흥 장군을 보내어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도록 했는데, 진평왕이 신라 원병 1만여 명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오자 고구려군이 퇴각하고 말았다는 내용의 기사다.
온달이 출정했다가 전사한 전투는 이 북한산성 전투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리고 이 시기 고구려가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한 것은 바로 북한산성(아차산성) 주변에 고구려가 이미 쌓아 놓았던 20여 개의 보루가 밀집돼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온달이 아차산성 아래에서 전사했다고 하면, 온달문화축제는 단양군이 아닌 광진구나 구리시에서 개최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고고학은 이처럼 전설이나 구전으로 인해 잘못 인식된 역사의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는 중요한 근거 자료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때로는 그것이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지라도 말이다. 문화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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