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미네르바를 체포했다. 그의 행위가 법의 처벌의 대상인지 여부는 법원에서 결정할 문제이다. 그러나 미네르바 사건이 정부에 대한 비판을 막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최근의 정부의 행태를 보면 이러한 우려가 기우이기만을 바라기는 힘들어 보인다.
미네르바 신드롬의 첫 번째 책임자는 정부이다. 미네르바가 국민을 현혹하고 사회에 악영향을 끼쳤다고 치자. 사실 익명의 가면뒤에 숨어서 하는 논쟁은 이성 보다는 감성에 호소하게 되고 정당성이 결여될 수밖에 없다.
정부 발표대로, 대한민국 정부가 2년제 대학을 졸업한 무직의 30대 청년이 그토록 두려웠단 말인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개인의 글 몇 줄에 흔들릴 정도의 국가란 말인가? 미네르바의 말 한마디가 국민을 현혹시킬 것이 두려웠단 말인가? 대한민국은 미네르바라는 개인에게 흔들리지도 않고, 우리 국민들은 30대의 청년의 말 한마디에 현혹될 정도로 어리석지도 않다.
정부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미네르바라는 한 개인이 아니라, 국민이 정부보다도 미네르바의 말에 더 공감을 하도록 만든 그간의 정부의 행태이다. 정부가 단기적인 성과 부풀리기에 집착하지 말고 국민과 소통하고 경제를 살리는 것이 해결책이 될 것이다.
두 번째 책임자는 지식인이다. 그 동안 수많은 지식인들의 예측은 빗나갔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누구도 예측하기 힘들었고 예측이 틀리는 것은 그다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미국의 경제대통령이라 불리우던 앨런 그린스펀도 틀렸지 않은가? 오히려 부끄러운 일은 국민들이 지식인들의 권위있는 목소리에 목말라 할때에는 목소리를 내지 않다가,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격으로 이미 벌어진 과거를 설명하면서 편한 방법으로 권위를 지키려 하였다. 미네르바가 객관성이 결여된 데이터와 비논리적인 언어로 감정에 호소할 때, 이에 대항하여 국민을 올바로 이끈 지식인은 없었다.
또 다른 미네르바의 출현을 막는 길은 조선시대의 사간원(司諫院)처럼 프랑스의 에밀 졸라(Emile Zola)처럼 지식인들이 제 역할을 다함으로써, 익명의 장막 속에 숨어사는 또 다른 미네르바가 발을 못 붙이게 하는 것이다. 영어에 침묵은 금(Silence is gold)이라는 격언이 있다. 하지만 지식인에게 침묵은 때로는 유죄(Silence is guilty)일 수도 있다.
세 번째 책임자는 국민이다. 우선 대중은 ‘외국학위를 소유한 외국금융계 경력이 있는 50대’라는 그의 허위 이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가 ‘2년제 대학을 나온 무직자’라는 신분을 밝히고 글을 썼다면 지금과 같은 파괴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얼마전 한국사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보여준 학력파문은 한편으로는 그것이 가능하게 한 우리의 사회풍토에 기인한다. 정보의 홍수속에서 이를 취사선택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개인의 책임이다.
또 공식적인 정부의 권위는 못 믿으면서도 익명의 가면뒤에 숨은 비공식적인 권위에는 동조하는 이중적인 모습도 문제이다. 인터넷상에서의 정도를 넘어선 악플은 이러한 이중성의 단면이다. 국민 스스로도 익명에 편승하여 익명의 가면뒤에 숨어서 불특정 다수를 향한 분노를 표출하면서 책임은 지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등장인물 하이드로부터 우리는 과연 얼마나 자유로운가 되돌아볼 때이다. 어려울 때 일수록 감정보다는 이성에 귀 기울이고, 스스로를 자제하고 주위를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이야말로 불특정 다수에 대한 공격성의 표출 보다는 가까운 사람부터 돌아보는 배려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이 난국을 극복하고 함께 웃을 수 있어야만 한다.
/임형백 성결대학교 지역사회개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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