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소회(時論所懷)¶/이태희 법무부 교정본부장¶¶언제나 답답했었다. 교정행정을 백안시 하는 편견의 굴레는 모질기만 했고, 터무니 없고 무수한 풍문들이 가공해 낸 일상화된 모함과 누명들은 푸념조차 힘에 벅찬 일선의 피곤한 교도관들에게 깊고 큰 내상(內傷)들을 입혀왔다. 혹여 대중에 의해 임의로 규정되고 도색된 스스로의 초라한 모습에 길들여져 조직원들이 각자의 삶을 초라하게만 규정지을까봐 두렵기도 했었다.
우군(右軍)이 없었다. 교도소의 실상과 조직원들의 땀흘림을 가감 없이 전달해 줄 수 있는 졸업생(?)들은 사회적 명예감의 손상을 우려하여 복역 사실 자체를 감추기 일쑤여서 홍보역할을 기대하기란 무망(無望)하다 보니, 세상을 떠도는 교도소 이야기라는 것들은 전과를 훈장처럼 자랑하는 집단의 똘마니들이나 떠드는 각색되고 허황된 영웅담이 전부였다. 그뿐이랴! 젊은 세대가 가까이 하는 영화, TV 등 영상물은 물론 문학작품에 이르기까지 소통의 매체들은 언제나 교도관들을 악역의 장신구처럼 등장시켜 함부로 조롱하고 매도해 왔다. 교도관이 보아도 재미있을 수 밖에 없을 영화인 ‘쇼생크 탈출’ 등 각종 매체의 교도소 이야기는 각인(刻印) 효과를 통해 대중들에게 치욕과 수모의 교도관 상(傷)을 꾸준히 확장시켜 왔었던 것이다.
영화나 소설에서 범죄자는 한결같이 누명을 쓰거나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고, 범죄할 용기는 결코 지니지 못한 대다수 선량한 국민들의 일원인 교도관들을 항상 악역으로 존재하게 하는 허구적 구도나, 그 구도가 목표하는 상업적이고 헐리우드적인 카타르시즘의 추구를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아직껏 그 식상한 콘텐츠를 반전시키지 못하는 작품관이 안타깝고 씁쓸한 것은 사실이고, 더욱이 현실과 가상의 공간을 혼돈하는 요즈음의 일부 젊은 PC방류 세대들에게는 범죄적 인간에 대한 추종을 부채질하거나 국가 공권력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을 고착시켜 가리라는 노파심을 감출 수는 없었다.
이렇듯 교정 실상이 사회 일반에 오도되고 있는 실태를 개선, 그 인식의 간극(間隙)을 좁히고 교정행정에 대한 국민의 적극적인 참여와 이해를 유도하고자 노력해 오던 차에 경기일보사가 망외(望外)의 큰 선물을 필자에게 안겨주어서 지난 1년간 졸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독자들에게 교정행정의 실태와 중요성을 알릴 수 있는 기회로 여기고 절치부심 나름대로의 의견들을 이 난(欄)에 개진해 왔었다.
지금도 전국의 교정시설에는 수많은 수형자들이 저마다의 변명과 아쉬움을 간직한 채 세상과는 전혀 다른 삶의 울타리를 이루고 있다. 이렇듯 더운 날이면 가당찮은 꿈일지라도 그들 또한 시원한 바다를 그리고, 좁은 창 너머 하늘의 별자리라도 보이노라면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처럼 설레고 잠을 설치며 후회와 각오의 시간들을 여밀 것이다. 갇힌 자도, 지키는 자도 다 같이 외로운 이 바닥을 두고서도 흔들어 오는 내외의 갖은 오해와 질책이 만만찮아 더러는 부석부석 힘이 빠지지만, 잘 살고 있다는 출소자의 편지 한 통에 아득한 마음의 산을 숨 보채며 다시 오르는 부류가 교도관들이다.
아무쪼록 그동안 지면을 통해 마주한 독자제위 중 어느 한 분에게라도 이 논의의 장이 교정행정에 대한 관심과 이해의 폭을 넓히는데 참고될 수 있었기를 소망한다. 끝으로 우리 1만4천여 교도관들은 사회 방위와 수형자 교정교화라는 교정 본연의 사명을 완수하고자 눈, 비 속에 깃발을 든 철도원처럼 꿋꿋하게 서서 수형자들을 위한 삶의 방향과 건널목을 지켜갈 것임을 약속드린다.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