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지상파 방송의 개그 프로그램 중 지독한 소통단절을 겪는 어느 가정의 모습을 희화화한 ‘대화가 필요해’라는 코너가 오랫동안 사랑을 받고 있다. 가부장적 권위를 내세우는 아버지가 어머니나 아들의 말 한마디를 듣고 섣불리 속단하여 야단을 친다. 그러나 실상을 파헤치다 보면 결국 아버지의 허물 때문임이 드러나게 된다. 곤란에 빠진 아버지는 그냥 “밥 먹자”라는 말로 눙쳐버린다.
최근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 문제 및 그에 따른 촛불문화제를 대하는 정부당국의 모습을 보면 개그 코너에서의 어설픈 아버지의 모습이 연상된다. 국민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지 않은 채 섣불리 미국과의 협상을 해치우고 와서는 그것에 대해 항의하는 국민들의 소리 듣기를 불편해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의 외침을 듣지 않고 적당히 눙치려 하는 정부에 대해 국민들의 분노는 마침내 폭발하고 만 것이다. 개그 프로그램에서 아들과 소통하지 못한 아버지의 억지는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불러일으키지만, 국민과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 정부의 억지는 뭇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고 말았다.
올바른 소통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국가든, 회사든, 가정이든 구성원 사이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소위 지위가 높고 힘 있는 사람들의 자세가 달라져야 할 것이다. 자기 말을 많이 하기 보다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담긴 생각을 길어내기 위해 귀를 열어야 한다. 자기 뜻을 드러내는 데에만 익숙하고, 어느 자리에서든 자기가 하고 싶은 말하기에만 골몰한 상사라면 아랫사람과의 진정한 소통은 이루어지기 어려운 법이다. 말로만 소통을 외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소통의 여건을 만드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새 학기가 되면 교수들은 지도하는 학생들과 면담을 한다. 그 때마다 지도교수란 학생들의 대학생활과 인생에 있어서 좋은 선배요, 친구요, 상담자이니 필요할 때 주저하지 말고 교수방의 문을 두드리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상담을 위해 연구실 문을 두드리는 학생은 거의 없다. 따라서 진정 학생들과의 소통을 원하는 교수들은 학생이 찾아오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 학생을 찾아 나선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학생들을 부르고, 함께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고, 각종 학생활동에 동참한다. 교수가 진정으로 학생에게 마음을 열면 학생은 시나브로 마음을 열게 된다. 교수와 학생 관계라면 학생이 아닌 교수가 소통을 위한 주도권을 쥐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지위가 높아지고 힘을 더 가진 사람일수록 귀를 열고 들으려 하기보다 자기주장만 내세우려 하지 않나 싶어 우려하게 된다.
얼마 전 어느 기관의 자문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 열 명 가까운 각계 전문가들을 불러서 자문을 구하는 모임이었는데, 실제 전문가의 의견을 듣는 시간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 많은 시간은 그 기관의 장이 나와 이야기하는 시간이 되고 말았다. 어렵사리 전문가들을 불렀으면 그들의 고견을 한마디라도 더 들으려 해야 마땅한 것일 텐데…. 저렇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그 분은 과연 아래 직원들이나 일반 시민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하는 싶어 딱한 마음이 들었다.
21세기의 민주사회에서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자질로 올바른 소통능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과거 권위주의 때처럼 힘으로 군림하려 하고, 들으려 하기보다는 자기주장을 내세우려 한다면 소통은 난망하다. 힘 있는 사람, 높은 사람이 주도권을 쥐고 마음을 열고 귀를 열어야 한다. 시민보다는 권력자가 먼저, 부하보다는 상사가 먼저, 학생보다는 선생님이 먼저, 자녀보다는 부모가 먼저 귀를 열고 들으려 하고, 소통을 위한 여건을 만들어가야 한다.
박진우 수원대학교 정보통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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