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 마일- 파란 이별의 글씨

이태희 서울지방교정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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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부녀자 유괴살인, 초등생 성폭행 살인 등 패륜적 범죄행위가 기승을 부리자 제종 언론 및 시민단체들이 사형제도 및 그 집행의 존폐와 관련하여 다양한 의견들을 표출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서는 이미 오랜 기간 찬반의 논리가 명료하게 정리·대립되고 있는 터라 새삼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최근 모 일간지에 사형폐지론 쪽에 섰으면서도 사형집행인의 인권을 논거로 제시한 특이한 주장들이 게재되었는 바, 그냥 지나치기에는 찜찜해 다른 입장을 표명하고 싶었다. 거기에서는 “동물을 죽여도 죄의식을 느끼는데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무리 제도 안의 합법행위라 해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흉악무도한 인간들을 보면 사형이 집행되어야 하나 그 사람들을 죽여야 할 누군가를 생각하면 이것처럼 또 끔찍한 일이 없다”며 논리를 비약시키더니 마침내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형집행 관리도 있다는데 주변 사람들이 그 이상한 사형집행 관리를 슬슬 피한다”는 생뚱맞은 얘기까지 나오는 등 작문의 의도가 이해하기 힘들었다.

형벌의 집행을 관장하는 교도관들의 입장을 에둘러 헤아려 주는 마음이야 살뜰하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각인될 수 있는 행형의 이미지가 흥미롭기도 하지만 긴요한 현실의 문제를 논의할 때는 출처불명의 전언이나 비현실적 관념론에 매몰되는 우(愚)를 경계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행형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교도관이 그 본연의 임무인 형벌집행과 관련하여 불필요한 감정의 유발 및 개입이 제어될 수 있도록 현대적이고 과학적인 시스템을 강구·운영해 왔었다. 또한 오랜 세월 형벌의 집행에 종사해 온 교도관들은 필요한 사랑과 불필요한 정을 구분하는 지혜를 이미 스스로 터득하고, 무엇보다도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전문가들이므로 더는 이상한 웅변으로 논의의 본질과 쟁점을 흐트리지 말았으면 좋겠다. 혹여 잘못 전파되어 교도관의 자존을 왜곡·호도하고 대중의 판단을 흐리게 할까 염려되어서다.

차치하고, 근자에 다시 열기를 더하는 사형존폐론의 공방은 마침내는 시민적 결단으로 판가름되어져야 할 숙제일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차갑고 캄캄한 ‘그린 마일’의 문화적 야만을 지탄하는 의견이나, 또는 목숨 앞에 경건해야 할 의무가 착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냐는 소박한 분노 모두 일리 있는 추궁이어서 그 선택은 쉽지 않다. 아메리칸 버티고(American Vertigo)의 베르나르 앙리 레비(Bernard Henri Levy)가 “서구의 징벌정신이 오랫 동안 나병과 페스트라는 두가지의 경쟁모델 사이에서, 즉 배척하고 추방하는 권력모델과 인식하고 계산하고 결국 포함시키는, 보다 근대적인 권력모델 사이에서 망설였다”고 앨커트로즈를 앞에 두고 중얼거렸던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국민적 컨센서스를 모아 차분한 마음으로 결단을 내려 볼 시점에는 이른 것 같다. 영혼을 능멸한 죄에 이르기까지 관대해져 버리면 악을 부추겨 갈 것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인간성의 회복을 바라고 인내하며 같은 하늘 아래 그 죄를 보듬고 설 것인지, 아니면 관용의 임계선(臨界線)을 무시로 침범하는 흉악범들에게서 더는 미련을 접고 아쉽지만 이제 파란 이별의 글씨를 보낼 것인지, 그리하여 차라리 상처받은 영혼들을 돌볼 것인지.

어찌하랴! 이 불편한 진실과 선택 앞에, 명료한 좌표의 설정은 이윽고 국민들의 몫으로 다가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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