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빔밥 논술

<아는 것은 힘인가, 병인가?>

爭 點 討 論

시사쟁점 등 매주 하나의 주제를 선정해 심도있게 생각해보는 코너. 정보의 바다에서 알짜만을 건져 올렸죠. 어때요? 벌써 빠져들고 싶죠? 뭘 망설여요. 그럼 빠져봅시다!!

사람들은 흔히 ‘아는 것은 힘’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곤 합니다. 언뜻 생각해보면 그 말이 틀리지 않은 것이라는 판단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안다는 것은 행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이고 그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때론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말도 거론됩니다. ‘굳이 알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걸’이라는 생각이 드는 상황도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명제를 함께 비교하며 생각해봅시다. 무언가 아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힘이 되는 것일까요? 아는 것이 잘못된 결과를 이끈 경우는 제대로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아는 것이 힘이 된다는 명제가 궁극적으로 타당한지, 때론 아는 것이 병이되는 경우도 존재하는 것인지, 우리의 일상생활과 현대인의 모습을 살펴보며 토론해봅시다. /정윤희 상임연구원

<생 각 열 기>

조괄과 한신

[사례1]

조나라의 장수 조괄은 어려서부터 병법을 열심히 공부해 어느 누구도 그의 이론을 당해내지 못했다. 심지어 조괄의 아버지인 뛰어난 장수 조사도 아들의 해박한 지식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하지만 조사는 아들을 장수로 기용한다면 조나라는 망할 것이라며 걱정을 많이 했다. 전쟁터는 목숨을 내건 사지로 예상치 못한 일이 다반사이며 여러 변화가 일어나곤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병서에 나온 병법 이론만 중시하여 자신감에 충만해 있는 아들이 미덥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대안이 없어 조나라는 조괄을 장수로 삼았고 결국 진나라에 대패, 40여만 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조괄의 병서’라는 속담이 생겼다.

[사례2]

한나라의 장군 한신은 조나라(통일 진나라가 망한 후 생긴 다른 조나라)와 전투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그는 결국 전투에서 강을 등지고 싸우는 배수진을 택했다. 배수진은 손자병법에서 위험한 전술로 설명되어 있던 것이다. 조나라 군사는 물론 한신의 군사들까지도 이러한 방법을 택한 한신에 대해 병법도 모르는 무식한 짓이라 비웃었다.

하지만 한신은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1. [사례1]의 ‘조괄의 병서’가 의미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간략히 정리해봅시다.

2. 두 사례를 참고하여 해박한 지식이 나쁜 결론을 내는 경우도 있는지, 그러한 이유는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만일 조괄이 지식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라 평가한다면 지식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지 생각해봅시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은 그동안 상식처럼 통용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아는 것이 병,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말도 있지요. 과연 지식이란 인간의 삶을 행복으로 인도할 수 있을까요? 아는 것이 항상 힘이 될지, 병이되는 경우도 있을지 생각해봅시다.

명제Ⅰ. 객관적인 진리를 담지하고 있는 지식을 창출하고 습득하는 것은 가능하다!

Yes/(아는 것이 힘)

지식과 정보를 그 자체로 객관적인 진리라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근대 이후 관찰과 실험의 방법을 통해 이 세상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지식의 창출이 가능해졌다. 자연과학의 급속한 발달과 그로 인한 문명의 발달은 이러한 사실이 의심의 여지가 없음을 보여준다. 물론 간혹 기존 지식에 오류나 미흡한 점이 발견되기도 한다. 하지만 동일한 과학적 방법을 통해 오류를 보완하고 문제점을 해결하여 점차 진리에 근접해가고 있다. 특히 현대사회에 들어 정보나 지식은 방대한 규모로 축적되고 있으며 이를 종합하고 재구성한 이론과 지식이 세상의 객관적인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알 수 있으며 그에 대한 지식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세상을 변화시킬 힘을 지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을 알 수 없다며 회의주의에 빠지거나 신에 의존하는 나약함을 드러낼 필요는 없다. 인류의 역사는 앎의 확대 과정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 과정의 연장선상에서 끊임없는 지식의 탐구가 결국 궁극적인 진리를 밝혀줄 것이다.

NO/(아는 것이 병)

정보나 상식, 혹은 사실이라는 맥락에서의 앎은 무언가를 ‘안다’는 말로 통칭할 수 있겠지만 본질적인 의미에서 ‘진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특정 지식이 세상의 일부를 있는 그대로 설명하고 있다고 말하더라도 과연 그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더 큰 원리가 작용하고 있거나 다른 요인의 작용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9시에 먹이를 제공받은 칠면조가 그러한 규칙성을 참된 지식이라 생각할 순 있겠지만 추수감사절 아침 9시에는 먹이가 제공되는 대신 사람들의 식탁에 오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자연의 무한한 신비에 비하면 인류가 쌓은 지식의 진보란 사실 보잘 것 없는 것이며, 그 지식을 쌓아온 인간의 인식 능력 또한 한계가 있다. 인류가 터득한 지식이라는 것이 때론 유용함을 주는 경우도 있지만 이를 맹신하게 되면 엄청난 재앙을 불러 올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사실 현대사회의 지식이란 보편적 진리라기보다 이데올로기에 가깝고 권력의 행사와 관련되어 있는 것일 뿐이다.

명제Ⅱ. 앎은 실천을 이끌고 그에 따라 세상은 바뀔 것이다!

명제Ⅲ. 보다 많은 지식은 일상생활에 유용함을 주며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

명제Ⅳ. 현대사회의 지식추구는 자연에 대한 지배를 강화시키고 있다!

<쟁 점 이 술 술~>

‘아는 것이 힘이다’ 라는 말은 우리 귀에 익숙한 명언입니다.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이 말에 어떠한 시대적 배경이 존재하는지, 또 인류가 앎을 둘러싸고 어떠한 변화를 겪어왔는지 살펴봅시다.

1. ‘아는 것이 힘이다’는 누가, 어떤 의도로 한 말인가요?

‘아는 것이 힘이다’는 근대 영국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이 남긴 유명한 말이에요. 베이컨이 이 말을 한 배경에는 당시까지 세상을 지배하고 있던 종교적 억견이나 무지에서 벗어나 과학적 방법에 의해 지식을 탐구해야한다는 주장이 깔려있어요. 또 이러한 지식을 이용하여 인간이 자연을 제어하고 정복할 수 있다는 신념도 포함하고 있죠. 이는 근대 과학혁명의 태동기에 지식 획득에 의한 인간의 진보를 예고한 말이라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이런 시대적 배경과는 별도로 오늘날 이 말은 앎 자체가 인간에게 주는 효용을 폭넓게 포괄하는 말로도 쓰이고 있어요. 말 그대로 어떤 대상에 대해 지식을 가지면 힘, 지배력, 능력을 얻게 된다는 것이죠. 하지만 서양의 흐름과는 달리 ‘아는 것이 병’일 수 있다는 생각도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어요.

2. ‘아는 것이 병’이라는 말도 있나요?

‘아는 것이 병,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말도 우리 사회에 속담처럼 전해져 오고 있어요. 사실 이러한 내용은 동양 사상의 여러 문헌에서 발견되기도 하죠. 맹자는 ‘어느 책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모두 믿는다면 그런 책은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盡信書則不如無書)’는 말을 남겼어요. ‘아는 것을 다 믿으면 힘이 아닌 병이 될 수도 있음’을 지적한 거죠. 그 외 삼국지에 나오는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는 말도 널리 퍼졌죠. 이는 글자를 아는 것이 오히려 걱정을 끼친다는 말로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쓸데없는 걱정도 그만큼 많다는 뜻이에요.

3. ‘안다는 것’은 지식만을 말하는 건가요?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명제 속의 앎이란 지식, 특히 사실적이고 기술적인 지식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어요. 수학방정식이나 외국어능력, 컴퓨터 프로그램 사용법 등 우리가 교육기관에서 배우는 대부분의 지식들이죠. 이러한 지식들은 주로 이성적인 사고에 의해 유추되어지고, 실험이나 검증에 의해 명확하게 사실로 판명된 지식들이에요. 주로 ‘배워서 안다’, ‘공부해서 안다’라고 할 때의 앎이지요. 이 와는 반대로 삶의 깊이를 ‘깨닫는다’, 인생의 참 의미를 ‘안다’라고 할 때의 앎은 사실적인 지식이 아니라 도덕적, 윤리적 가치판단이 개입된 일종의 주관적 판단이라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사실적 지식이든 윤리적 판단이든 이성적 사고의 산물이라는 점에서는 같다고 할 수 있어요. 달리 말하면 사실적 지식은 ‘도구적 이성’이라 할 수 있고 윤리적 판단은 ‘비판적 이성’이라 할 수 있죠. 베이컨의 시대 이후 현재까지는 주로 도구적 이성, 즉 사실적 지식이 중시되어왔다고 할 수 있어요.

4. 근대 이후 사실적 지식이 중시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근대 이전의 사회는 종교나 신분제도 등에 의해 인간의 활동과 인식영역 전반에 많은 제약이 있었어요. 종교적 진리에 맞지 않는 과학적 발견은 배격되거나 신분에 의한 차별이 당연시 되는 등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인 측면이 많았죠. 그러나 근대에 들어 인간의 합리적 이성과 이에 기반한 지식만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이성중심주의가 대두하면서 사실적 지식은 새로운 진리로 각광받기 시작했어요. 수학적 계산, 가설과 검증, 경험을 통한 연구와 실험 등으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신념이 팽배해진 것이죠. 이러한 생각은 정치나 경제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쳐 근대 혁명과 산업 혁명 등 갖가지 사회변화를 낳았고 이는 결국 자본주의와 과학문명의 발달로 이어지게 되요. 이처럼 근대 이후에는 새로운 지식의 발견과 이에 의한 물질문명이 급속한 발전을 이룬 시기였기 때문에 사실적 지식이 각광받을 수밖에 없었어요. 이러한 배경 속에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자들은 대중들을 계몽하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길이라고 믿기도 했죠. 그러나 연이은 세계대전과 환경파괴 등 현대문명의 위기가 대두되면서 지식추구에 의한 인간의 힘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었죠.

5. 인간의 힘이 의심받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요?

근대 이후의 사회는 인간이 이성에 의해 의심할 수 없는 지식을 발견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지식위에 끝없이 발전할 수 있다는 일종의 낙관론이 팽배했어요. 그러나 과학적 지식이 사용 여하에 따라 통제할 수 없는 결과를 낳기도 하고, 인간 스스로가 지식의 대상이 되면서 물질화 되는 등 소외 상황을 맞게 되었죠. 또 세계대전에 의한 비극은 인간이성에 대한 본질적인 회의를 불러일으키게 되었어요. 지식이 아무리 양적으로 팽창해도 인간 본성에는 어떠한 발전이 없으며 오히려 비판 의식 없는 지식의 증대는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죠. 이러한 상황을 호르크하이머와 같은 철학자는 ‘이성의 타락’이라고 설명했어요. 지식을 구하는 자세의 본분은 진리탐구인데, 현대의 지성은 물질에 사로잡혀 물질문명 건설에 필요한 단순기능공으로 전락했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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