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

이태희 서울지방교정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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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시절의 애환(哀歡)-

교정시설은 애당초 인적 없는 멀리에 자리하여 알카트로즈를 자처했다. 범죄자에 대한 이 사회의 불관용은 불가근(不可近)의 추방물을 찍어냄에 있어 교정시설을 쓰레기하치장 보다 결코 하위에 놓아둘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멀리로 더 멀리로의 격리만이 형벌의 역량이요, 그 격리의 방벽마저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법이 주는 믿음이자 위안이었다. 그래서 교정시설은 언제나 숨어들었다. 제대로 된 길 하나 없는 궁벽한 산촌의 논두렁과 산기슭을 헤집고 파헤치며 가까스로 터를 잡았고, 이윽고 하나씩의 섬이 되었다. 그리고는 안도했다. 이 허허로운 바닥에서야 더 이상 퇴로를 염려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 바람마저 부질없고 터무니없음을 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교정시설을 따라 큰 길이 나자 그 길은 마치 연육교(連陸橋)처럼 교정의 섬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배척의 경계선은 어느덧 흔적없이 허물어지고 꾸역꾸역, 쉼없이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고적했던 섬마을은 삽시간에 부산한 삶의 너울에 휩쓸리고 말아버린다. 교정시설을 포위한 이주·정착민들은 교도소의 감시대보다 더 높은 빌딩을 짓더니 마침내 흰 눈 뜨고 교정시설을 감시하기 시작하고, 그리하여 다시금 불편한 이웃으로 전락하고만 교정관계자들은 본능처럼 몸을 움츠리고 사세(事勢)를 관망할 뿐이다.

교정시설을 백안시하는 사람들은 교도소나 구치소의 높은 담 안에는 맹수처럼 사납거나 상종 못할 인간 말종들만 가득하리라는 선입견에 매몰돼 있다. 일부 그런 부류들이 왜 없을까마는, 그러나 교도관들이 마주하는 더욱 많은 수의 재소자들은 우리가 늘상 마주치고 소통해 오던, 우리의 익숙한 이웃들임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 중에는 졸음·음주운전 등 운전과실로 사고를 낸 동네 유치원 아저씨나 매일 출근시 마주치던 시내버스 기사들도 많고, 힘든 제조업에 뛰어들어 가족을 위해 열심히 땀 흘렸으나 불경기에 부도나 입소한 아들 녀석 친구의 아버지들도 여럿 있고, 한푼 더 벌어 가계의 보탬이 되고자 곗돈 관리하다가 돈 다 털리고 고생하는 내 친구의 어머니들도 많이 있다. 가족 한사람의 구금은 곧 전 가족의 마음을 구금해 버림을 이해할 수 있을 터에, 교정시설이 원격지에 있을 경우 생계를 돌보지 못한 채 그 멀리에까지 면회를 다녀야 할 가족들이 받을 부가적 고통 또한 짐작하기 어렵지 않으리라.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거주지 인근의 교정시설은 막연히 혐오의 대상으로 치부될 게 아니고 구속된 자의 가족, 친지, 지인 등 방문 민원인의 불편과 아픔을 덜어주는 주민편의시설이라고 강변해 봄도 지나침은 아닐 것이다. 또한 교정시설은 격리와 구금이라는 기능 외에 재소자의 교화·개선이라는 보다 중요한 과제를 수행하는 기관이다. 따라서 출소 후의 원만한 자활과 정착을 위한 기능·기술력의 배양을 위해 다양하고 체계적인 직업훈련을 시행하며, 이러한 직업훈련은 사회 유수한 관련 기업들과의 연계와 교류 시스템을 확보할 때 그 효율성을 배가시킬 수 있다. 아울러 정서함양, 심성순화 등 마음의 도덕률을 깨우치게 하는 각종 교화프로그램 또한 종교인, 대학교수 등 자원 봉사하는 사회명망가들의 조력이 있음으로 하여 활성화되고 좋은 성과도 거두어진다. 말하자면 교정시설이 도시나 도시 근교에 위치하지 못할 경우에는 시설 본래의 임무수행과 목표의 달성은 지난(持難)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찌하랴! 좁은 나라 땅 어디에 자리잡은들 불편한 눈과 마음에서야 교정시설이 쉽게 가려질까. 우리 마을에 내린 눈 우리가 쓸고 치우듯 우리 이웃의 실수와 상처들 또한 우리가 보듬는다는 마음이 되면, 교정시설이 옆집 건물처럼 보여지기도 하고 생각의 간극 또한 좁혀질 수 있으리라.

이태희 서울지방교정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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