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자에 법관 및 검사들의 교정시설 체험이 빈번하게 시행돼 언론의 관심사로 기사화되곤 한다. 이는 수용체험을 통해 형벌집행 등 형사실무에 대한 현장감을 체득함과 동시에 재소자 인권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시행하는 것으로서 바람직한 시도임에 틀림없다. 교도관들 또한 신임교육과정은 물론, 현장 근무자 중 자원자들을 대상으로 수시로 수용체험을 하게 해 재소자의 입장에서 거울을 들여다보듯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 이는 도식화된 교정담론, 혹은 길들여진 사고에서 벗어나 몸으로 부딪치며 행형의 맨 얼굴을 바라보고 그 속살의 정체와 내음을 재인식하도록 해 재소자에 대한 보다 인간적이고 문화적인 배려의식을 고양시켜 나가자는 데 그 뜻을 두고 있다.
돌이켜보면 오늘의 행형은, 근대행형의 효시라 할 수 있는 16세기 암스테르담 징치장의 ‘두려워 말라, 나는 너에게 복수하려 함이 아니고, 개선시키려 함이로다. 나의 손은 엄하나 나의 마음은 따뜻하다’라는 슬로건을 필두로 18세기 존 하워드(John Howard)의 헌신적인 감옥개량운동을 거쳐 종국에는 지원수로서의 체험을 마다하지 않았던 용감하고 정열적인 행형인들에 의해 완성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13년, 미국 뉴욕 주의 오번 시장을 역임한 오스본(T. Osborne)은 오번 교도소에 가명(假名)을 쓰고 지원수를 자청해 상당 기간 흉악범들과 같이 생활했고 수용체험을 통해 재소자도 사람이므로 그들을 신뢰하는 마음가짐이 없이는 교정교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 수형자 자치제라는 교정 시스템을 연구하게 됐다. 이후 싱싱 교도소에서 과학적인 수형자 분류 방법을 전제로 한 자치제를 시행, 성공적으로 정착시킴으로써 오늘날 모든 국가의 행형자치제의 전범(典範)이 되는 뛰어난 행형제도가 창안됐던 것이다.
또한 일본의 세계적인 행형학자 마사키 아키라 박사는 동경제대 재학시절인 어린 나이 때부터 행형학이라는 미지의 학문에 심취해 장차 교도소장이 되리라 결심하며 교정시설을 견학하길 주저하지 않았고, 이후 1918년 사법관 시험에 합격, 검사로 활동하면서도 교도소장과 협의해 신분을 감추고 흉악범들과 거실 및 공장생활을 같이 하며 인본주의에 기반한 행형의 개혁방안 연구에 땀 흘렸다. 그 결과 사법성 행형국장을 역임하기까지 교정시설 건축의 쇄신, 행형누진처우제도 마련, 형사정책범론(刑事政策汎論) 외 다수의 행형서적 발간 등 행형발전에 큰 족적을 남길 수 있었다.
오늘날의 행형은 앞에서 예시한 계몽 사상가들의 선도적 땀흘림과 박애주의적 개혁자들의 몸을 사리지 않는 헌신에 힘입어 인격행형(人格行刑)이 행형처우 전반에 구현되고 있다. 더욱이 대한민국의 행형은 유럽, 일본 등 선진국에서 벤치마킹의 보고(寶庫)로 여길 정도로 제반 수용처우시스템의 급속한 발전을 이뤄 왔다. 다만 처우의 지나친 배려가 기율의 이완을 불러오고, 형벌 본래의 의의인 응보적 역할의 훼손을 우려하는 시각도 더러 있으나 인간 교정이라는 정답이 없는 방법의 선택은 결국 인간적인 배려로 귀착될 수 밖에 없는 노릇이라 생각된다.
덧붙인다면, 외부인의 교정시설 체험은 아무도 없는 거실에 문득 재소자의 입장이 돼 우두커니 앉아있기 보다는 차라리 일일(一日) 교도관이 돼 재소자들의 일상을 관찰함이 행형 실상을 파악하는데 더욱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높은 담장 안쪽의 생활에서도 지키고, 돌보며 이제는 일선 교도관들이 오히려 형벌의 무게를 힘들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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