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레카 > 김봉석의 대중문화로 읽는 논술

처절한 고통 끝에 보이는 ‘비밀의 빛’  <영화  밀양>

칸영화제에서 전도연이 여우주연상을 받은, 이창동 감독의 <밀양> 이 150만 관객을 넘었다고 한다. 90년대까지만 해도 칸영화제 수상작이라면 어느 정도 흥행성에서 프리미엄이 있었지만, 2000년대에는 오히려 고리타분한 영화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지나치게 예술영화 취향이라는 꼬리표가 붙었기 때문이다. 물론 <밀양> 도 ‘예술영화’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밀양> 은 인간과 세계 그리고 구원과 용서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깊이 있게 파고 들어간다. 소설가 출신다운 입담으로, 진득하게 이야기를 끌어가기 때문에 쉽게 이야기에 빨려 들어간다. 우울하거나 심란해질 수는 있어도, <밀양> 을 보면서 적어도 ‘지루하다’는 생각은 쉽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창동 감독의 네번째 영화 <밀양> 은 신애라는 여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신애는 사고로 남편을 잃고 아이와 함께 남편의 고향인 밀양에 살러 왔다가, 아이가 유괴되어 죽는 비극을 당한 여자다. 그리고 고통과 비탄에 빠진 신애를 묵묵히 지켜봐 주는, 적당히 속물적인 밀양 남자 종찬이 있다. 어떻게 보면 <밀양> 은 절망에 빠진 여자를 지켜보는 남자의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언제나 그녀를 받아주고, 언제나 그녀를 위해 웃어주는 한 남자의 시선으로 <밀양> 은 진행된다. 하지만 그녀는 종찬의 시선을 받아줄 여유가 없다. 세상은 너무 가혹하고, 신이 있다면 아마도 그녀에게 벌이나 시험을 내리는 것일 게다. 편파적이라고 느낄 만큼 가혹한 벌을.

<밀양> 은 신애와 종찬의 사랑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세속적인 사랑 이야기는 아니다. 처음 밀양으로 온 신애는 자신이 알고 있는 ‘밀양’의 뜻을 말한다. ‘비밀의 빛.’ 그것은 제목을 의미할 뿐 아니라, 영화의 테마로도 직결된다. 이창동이 관심 있는 것은 지고지순한 사랑이나 애절한 슬픔 같은 것이 아니다. 그의 관심은 인간의 혼돈스러운 내면이다. 선과 악이 뒤엉켜 놀아나고, 애정과 분노가 서로를 위로해주는 진기한 내면의 풍경.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당연히 존재하는 내면이지만, 그걸 우리가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기 위해서는 더욱 처절한 조건이 필요하다.

<밀양> 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처음은 남편을 잃고 아이와 함께 밀양에서 살아가는 신애의 모습이다. ‘불행하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신애의 얼굴은 불행해 보인다. 아이는 아빠를 그리워하지만 신애의 마음은 모호하다. 죽기 이전에 이미 남편은 그녀를 버렸지만, 신애는 인정할 수 없다. 그녀가 밀양으로 온 이유는 아마도, 자신이 결코 배반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그저 자신에게라도 그렇게 확신하고 싶어서. 그런 신애에게서, 신은 가혹하게도 아이를 뺏어간다. 두 번째 부분은 아이를 잃고 절망에 빠진 신애가 종교에 귀의하는 이야기다. 울 기력조차 없었던 신애는 우연히 부흥회에 갔다가 통곡을 하고 모든 것이 평화로워진다. 슬픔과 절망조차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며 신애는 종교생활에 몰두한다. 하지만 그녀가 진정으로 평온해지기 위해선 아이의 유괴범을 용서해야만 한다.

신애는유괴범을 직접 보고 용서하겠다면서 면회를 간다. 그리고 이미 하나님에게 용서받은 유괴범을 본다. 과거를 뉘우치지만, 이미 모든 것을 용서받고 너무나도 평온해진 유괴범을. <밀양> 의 마지막 부분은 이제부터 시작된다. 어차피 용서하려 했던 유괴범이 이미 용서받았다면 그건 좋은 일이 아닐까? 신애가 원했던 것도 결국은 용서였으니까. 하지만 신애가 원한 것은, 자신이 그를 용서하는 의식이었다. 자신이 원수를 용서할 정도로 마음을 정리했고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였음을 자신에게 각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틀어졌다. 그녀는 원초적인 분노에 휩싸인다. 나는 이토록 괴로워하는데, 어째서 유괴범이 저토록 평온할 수 있는가. 신애는 유괴범을 증오하고 하나님에게 힐난한다. 어째서 나에게 고통을 준 악인에게 모든 것을 용서하고 천국을 약속할 수 있는지를. 그래서 신애는 반항을 한다. 물건을 훔치고, 장로의 남편을 유혹하고, 자해를 한다. 이 모든 악행을 하나님이 정말로 보고 있는 것인지, 알고 싶어 한다. 그렇게 그녀는 무너져간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절망이 닥쳤을 때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까? 그냥 도망쳐버릴까, 아니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발악을 해 볼까, 그도 아니라면 절망의 끝까지 더욱 더 떨어져버릴까. 어차피 정답은 없다. 쉽게 답이 찾아질 수 있다면 그런 절망조차 오지 않았을 것이다. 신애는 종교를 찾았다가 다시 버린다. 결코 <밀양> 은 종교를, 특히 기독교를 비판하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이창동은 종교적인 구원에 대해서 신 혹은 세상의 섭리에 대해 완강하고도 끈질기게 이야기한다. 운명처럼 누군가에게 도저한 절망이 찾아온다. 그것을 이겨내는 방법은 없다.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견뎌내야만 한다.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도망치거나 뭔가에 의지한다고 해서 고통과 절망이 사라지지도 않는다. 거기에는 뭔가 이 세계의 비밀이 있다. ‘밀양’은 실재하는 소도시인 동시에 세계의 비의(秘意)에 대한 은유로 작용한다. 신은 결코 눈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바로 쉽사리 눈에 보이지 않는 비밀의 빛인 것이다. 이창동은 <밀양> 에서 그 빛이 무엇인지를 직접 보여주지 않지만 그 빛을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지를 넌지시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밀양을 찾아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다. <밀양> 은 문학적인 영화다.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밀양> 에 담겨진 모든 것은 서로 치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대사 하나와 소품 하나, 인물의 동선과 버릇 그리고 소사(小史)까지 세세히 들여다보았을 때 <밀양> 의 세계가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모든 것이 너무 꼼꼼해서 숨이 막힐 정도로 가득 차 있다. <밀양> 은 눈으로 보는 세계가 아니라, 눈으로 보는 것을 이해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세계다. 밀양의 뜻이 말해주듯, 그 비밀스러운 빛을 보아야 들어설 수 있는 세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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